일본 문화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정판(限定版)', '한정반(限定盤)'이라는 단어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영어로는 'limited edition'이라고 표기한다. 정확하게는 限定販売商品(한정판매상품)이라고 쓰는데, 본래는 특정 상품을 상품화하기 전에 일정 기간 동안 시험 판매를 하는 마케팅 수단의 하나였던 것이 오늘날에는 한정판매상품 그 자체가 강한 상술을 띈 판매 수단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한정판매상품은 크게 '지역한정상품(地域限定商品)'과 '기간한정상품(期間限定商品)', '수량한정상품(数量限定商品)', '장소한정상품(場所限定商品)'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지역한정상품(地域限定商品)
지역한정상품이란 이름처럼 특정 지역에서만 판매하는 상품을 의미하는데 일본에서는 컵라면이나 캔음료 등에 이런 상품이 상당히 많이 있다. 홋카이도에서만 판매하는 컵라면이라던가, 하카타에서 파는 라면만 스프의 재료가 다르다던가 하는 지역적인 특색들이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도 서울에서는 대부분 참이슬이나 처음처럼을 마시지만 부산에서는 C1소주, 제주도에서는 한라소주를 마신다. 이런 것이 바로 지역한정상품이다.
기간한정상품(期間限定商品)
기간한정상품은 특정한 기간 동안만 판매하고 그 후에는 판매하지 않는 상품을 의미하는데, 일본에서는 이러한 기간한정 상품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삿뽀로 맥주의 계절한정상품이 유명한데,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각기 다른 맥주를 판매하며 해마다 해당 맥주의 포장과 맛도 미묘하게 변화해 지금이 아니면 마실 수 없는 것처럼 소비심리를 자극한다. DVD나 게임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초회한정반(初回限定盤)', '예약판매상품(予約販売商品)'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삿포로맥주의 가을한정상품인 ‘아키나마(秋生, 왼쪽)’와 겨울한정상품인 ‘겨울이야기(冬物語, 오른쪽)’. 2007년은 이 2개의 상품이었지만, 2008년에도 같은 상품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수량한정상품(数量限定商品)
수량한정상품도 역시 DVD나 게임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일정한 수량만큼만 생산한 뒤 더 이상 생산하지 않는 상품을 의미한다. 수량한정생산은 서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전 세계에 30대밖에 없는 페러리”라던가 “전 세계에 10대밖에 만들지 않은 시계” 등, 주로 명품의 세계에서 이러한 수량한정상품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특이하게도 이러한 수량한정상품이 주로 대중적인 상품에서 많이 사용되는 상법이라는 점이 서구와는 다른 점이다.
일본의 수량한정상품은 그 역사가 상당히 깊은데, 메이지시대에 단팥빵을 발명했던 긴자의 빵집 ‘기무라야(木村屋)’의 경우는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정해진 개수의 단팥빵만 팔았고, 이 때문에 단팥빵을 먹기 위해서는 항상 줄을 서야만 했다고 한다. 오늘날도 일본에서는 “하루에 50그릇만 파는 라면집”, “하루에 10명에게만 파는 메뉴” 등 수량한정상품을 음식점 등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우리로서는 조금 이해하기 힘든 문화지만 오타쿠 업계의 수량한정상품들의 기원도 결국은 이런 곳데서 찾을 수 있다.
단팥빵을 발명한 긴자의 빵집 기무라야. 지금은 단팥빵을 정해진 개수만 판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장소한정상품(場所限定商品)
장소한정상품은 특정한 장소(주로 특정 상점)에서만 판매하는 상품을 의미한다. 주로 안테나 샵에서만 판매하는 상품이나, 유원지에서만 판매하는 상품 등이 이러한 장소한정상품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장소한정상품에 수량한정과 기간한정의 개념을 뒤섞은 상품들을 판매하는 상술이 등장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장에서만 한정판매하는 CD나 사진집 등이다. 요즘은 이러한 상품들에 또 다른 한정 상품을 구매하기 위한 추첨권을 끼워 넣는 등의 도를 넘어선 상술이 판을 치기도 한다.
지역한정이나 장소한정의 경우는 단지 정해진 장소에서만 살 수 있다는 것일 뿐 언제든지 상품을 구매할 수 있고, 기간한정도 정해진 기간에만 물건을 구매하면 누구라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수량한정은 한 번 손에 넣지 못하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점에서 다양한 주변현상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장 좋은 예가 일본에 여행하다 보면 이른 아침에 흔히 볼 수 있는 전자제품 매장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닌텐도DS를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로서, 닌텐도는 발매 초기부터 지금까지도 정해진 날짜에 아주 적은 수량의 물건만 상점에 공급하는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공산품들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수량한정, 초회한정, 예약특전 상품 등이 그렇게 많이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 급격하게 확대되어서 2000년대 이후로는 오타쿠 상법에서는 당연히 통과해야 하는 의식처럼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것은 1991년의 버블붕괴로 시작된 10여 년 간의 경제불황이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은 1980년대 급격한 엔고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 기업들에 대한 금융지원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서 일본국내의 자금유동성이 급격하게 높아지게 되면서 내수가 과열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버블경기’다. 1991년 부동산 붕괴로부터 시작해 버블경기는 붕괴되고 일본 경기는 침체일로를 걷게 되는데 이는 당연히 내수의 감소를 동반했다. 1980년대의 호경기를 바탕으로 형성된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이른바 오타쿠 산업이 내수의 침체에 의해서 받게 된 타격은 상당한 것이었고, 이를 시장의 확대보다는 한정된 소비자의 소비액수를 늘리는 방법으로 해결한 것이 1990년대 중반 이후의 오타쿠 산업의 주된 상법이 되었다.
인생게임 20주년 기념 한정판. 한정판에 기념품이나 이벤트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상술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메탈기어 솔리드 4 한정 컬러 플레이스테이션3의 광고. 이런 것이 전형적인 수량한정, 기간한정 판매 상품.
굳이 오타쿠들이 아니더라도 일본인들 모두가 한정상품을 상당히 좋아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수박에도 빨간 줄을 긋고 '한정판매'라고 써 붙이면 불티나게 팔릴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일 정도로 일본인들은 한정판매상품을 좋아한다. 일본인들의 한정판에 대한 집착은 이상할 정도로 강한데,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조금만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해되는 현상이다.
필자가 일본에 처음 갔을 때 크게 놀란 것이 횡단보도의 파란 불이 깜빡여도 누구도 뛰지 않는 것이었는데, 일본은 보행자 쪽의 신호가 매우 길어서 멀리서 횡단보도가 파란불로 바뀐 것을 보고 천천히 걸어가도 충분히 건널 수가 있다. 횡단보도 신호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를 보여주는 한 단면인데, 일본은 횡단보도의 파란 불처럼 힘들게 서두르지 않아도 자신에게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크던 적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사회다. 정확하게는 버블붕괴 이후 그런 사회가 되어버렸다. 어찌 보면 매우 공평한 사회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것은 계급중심적이면서도 그러한 체제를 쉽게 거스를 수 없는 정적인 사회 분위기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소수가 특권을 지나치게 독점하다 보니 나머지 다수에게는 오히려 공평하게 느껴지는 조금 이상한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정판매란 그런 사회 속에서 느끼는 작은 일탈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생활을 해보면 여러 가지 한정상품을 통해 상당한 이득을 볼 수도 있다. 특히 슈퍼마켓의 타임세일이나 부동산이나 자동차업계의 캠페인(우리가 흔히 ‘세일’ 혹은 ‘마케팅 이벤트’라고 부르는 것을 일본은 ‘캠페인’이라고 부른다.) 등을 통해 똑 같은 상품을 20~50% 싸게 구입할 수 있다. 식품의 경우는 심할 경우 수량한정판매를 통해 물건값의 10%만 주고도 물건을 살 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결국 일본인은 일상을 통해 한정상품을 학습하고 있는 셈이다.
타임세일은 일본 어디에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이다.
일본인이 특히나 수량한정상품에 열광하는 것은 일본인이 지니고 있는 상품에 대한 특유한 정서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경험에 대한 자기만족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내가 만약에 라면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XXX가게의 하루 50개 한정 메뉴 정도는 한 번은 먹어봐야만 라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일본어로 ‘지만(自慢)’이라고 하는데, 우리말의 ‘자만(自慢)’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영어의 pride에 가까운 의미로서 자부심을 의미한다. 그저 자기만족 내지는 자부심에 의해서 한정판매에 매달리는 측면도 있다.
일본에서 살아보면 사람을 사귀기가 쉽지 않은데, 조직사회 속에서의 인간관계가 철저하게 업무적인 것으로 제한된 일본 사회에서 학교 이외의 공간에 인간관계를 만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취미를 통해서다. 일본에서 오타쿠 문화가 크게 발전한 것에는 이러한 사회적 배경도 상당부분 큰 영향을 주었다. 사회라는 큰 조직 속에서는 자신을 드러내고 내세울 수 없지만 취미를 공유하는 작은 커뮤니티 속에서는 상대방을 상처 입히지 않고 나도 상처 받지 않으면서 경쟁은 하고 싶어하는 의식이 바로 한정상품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조금 어린아이 같지만, 그런 것이 일본 사회이고 일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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