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 : 네티즌의 힘, 언론의 굴욕
네이버, 다음, 야후, 엠파스 등 대형 포탈은 예외없이 댓글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댓글기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주로 2003년과 2004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댓글 기능이 부여됐다.
이전까지만 해도 인터넷상에서도 네티즌들은 언론사가 제공하는 뉴스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왜곡보도가 있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특정한 웹진 등에서 반박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포탈 사이트의 댓글기능은 우리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으로 진화했다. 댓글 그 자체가 저널리즘이 되었고, 댓글을 다는 네티즌들이 언론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의도적으로 비틀어서 해석한 뉴스에는 가차없는 댓글이 달리고, 그 댓글에 또다시 댓글이 주렁주렁 달리면서 해당 기사와 기자는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장면을 쉽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또한 네티즌들은 포털 사이트의 편파적인 편집에 대해서도 대거 항의하며 탈퇴운동을 벌이는 등 수동적 수용자가 아닌 적극적인 소비자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 지금부터 네티즌들이 우리나라 언론의 왜곡보도에 어떻게 싸웠는지 대표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댓글, 어디에 쓰는 물건인고?
댓글은 원래 정치웹진 등에서 시작된 시스템이다. 토론을 위해서는 댓글 기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딴지일보, 서프라이즈 등에서는 댓글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됐으며, 수백개의 댓글이 달리는 경우도 생겨났다.
하지만 2004년 포털 사이트에서 댓글 시스템을 도입하기 이전에는 특정 사이트 내에서의 매니아 유저들의 전유물이었다.
언론의 보도에 대항하는 반론도 특정사이트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즉 네티즌들의 역량이 한 곳으로 모아지지 않고 각 언론사 사이트의 해당 기사 밑에 개별적으로 반박 댓글을 다는 수준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조선일보의 르몽드 기사의 왜곡번역이 있다. 2003년 11월4일 프랑스의 르몽드는 ‘조중동, 대통령과 전쟁하는 족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는 르몽드의 필립 폰스 도쿄 특파원이 한국 언론의 상황과 여론 독과점 현상을 비판한 기사였다.
그런데 같은 기사를 조선일보는 전혀 다른 뉘앙스로 해석해서 실은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비판적인 신문들의 과도함에 대응하고픈 한국정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마치 르몽드가 한국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보도에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뉘앙스의 비판기사로 왜곡해석해 보도했다.
그러자 같은 기사를 번역해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던 김정란 상지대 불문과 교수가 즉각 오마이뉴스에 조목조목 번역의 오류를 지적하는 반박기사를 게재했다.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김정란 상지대 불문과 교수의 조선일보 반박문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152570)
그 결과 조선일보는 네티즌들의 항의에 무릎을 꿇고 사과문과 함께 번역을 정정하는 기사를 실어야 했다.
(김정란 교수의 지적을 받은 후 조선일보가 올린 르몽드 기사 왜곡번역에 대한 사과문)
기사 원문 :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110770335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선일보의 해명이 또다시 논란이 된 것이다. 최초에 기사를 송고한 프랑스 파리 특파원은 제대로 된 기사를 보냈으나 chosun.com이 실수를 한 것이라고 해명했는데, 네티즌들은 그 경위를 밝히라고 요구하고, 더 나아가 ‘오역’이 아니라 ‘왜곡’이라며 반박하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최초 왜곡 번역기사는 정정기사로 대체되면서 아예 원문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이처럼 포탈사이트에 댓글 기능이 없었던 시기에는 언론의 보도에 관심을 가진 특정인들이 이를 자세히 반박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외신보도의 경우 해석에 있어서 높은 전문성이 필요하여 네티즌들의 참여 자체가 힘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언론의 왜곡보도에 제대로 대항하기 힘든 구조였다.
그런데 포털사이트에서 댓글 기능을 추가하면서 그 성격에 일대 혁명이 일어난다. 정치웹진 등은 전체 국민들로 보면 소수의 매니아들의 사이트였지만 포털 사이트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여서 그 효과는 대단했다.
하지만 토론은 실종됐다. 그저 비방, 조롱, 폭언 등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제 정신 가진 사람들은 쳐다보기 힘든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특히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의 ‘노무현 탓’은 댓글놀이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더 나아가 포털 사이트의 댓글은 ‘노무현 대통령 저주와 조롱’의 주무대가 되었다.
적어도 포털 사이트에서 댓글 기능을 도입한 초창기에 있어서 댓글은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언론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소위 ‘침묵하는 다수’였던 전 국민들이 ‘댓글을 다는 네티즌’, 즉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그 효과가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조롱을 하든, 토론을 하든, 반박을 하든, 적어도 자신의 의사를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했던 대다수의 국민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언론감시는 없고, 언론의 보도에 발맞추던 댓글
2004년 5월 국내 최대의 포털사이트인 네이버가 댓글 기능을 추가하면서, 적어도 정치적으로 보면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엄청나게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조중동을 비롯한 언론들이 거의 모든 정책이나 비판 소재에 노무현 대통령을 등장시키고 ‘노무현 탓’을 전파하기 바쁜 시점에 댓글 기능이 추가되었으니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댓글은 조중동 등 언론의 보도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모든 댓글은 ‘노무현 탓’ 혹은 ‘노무현 저주’에 나선 언론보도에 호응하는 댓글이 장악했다. 심지어 ‘노무현 탓’과 관계없는 기사에 대해서도 네티즌들은 댓글을 통해 대통령에 대한 조롱과 비난을 서슴치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강아지가 대통령을 경호한다’는 기사가 있다.
(대통령 경호에 강아지를 투입했다는 내용의 노컷뉴스 기사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office_id=079&article_id=0000009217§ion_id=100&menu_id=100)
이 기사는 경찰청에서 대통령 행사 경호 때 몸집이 큰 세퍼드나 리트리버 대신 몸집이 작은 코카스페티얼을 투입한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에 달린 댓글은 초창기 댓글의 전형을 보여준다 하겠다.
(노컷뉴스의 강아지 경호 기사에 달린 네티즌들의 댓글)
“진짜 개가 청와대 미친개를 경호하다니..”, “노무현은 개다. 그래서 노무현 친구를 붙여주는가부다. 대환영”, “개가 노씨보다는 낫다. 그나마 헛소리는 안지껄일거 아냐”, “별 희안한 뉴스를 다 본다. 개가 개구리를 보호한다니”, “거시기를 확 물어버려라” 등 읽어내기 힘든 댓글이 판을 치고 있었다.
이 당시에는 언론의 보도가 정확한 보도인지, 왜곡보도인지는 아예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노무현만 등장하면 우르르 몰려들어 일방적으로 저주와 조롱의 댓글을 달던 시기였다.
비단 대통령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연예인이나 스포츠스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가수 문희준씨였다. 2004년 7월 1일 가수 문희준씨의 ‘문희준, 록 자격증이라도 따고 싶어요’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인터뷰가 네이버에 오르자 순식간에 네티즌들의 비아냥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네티즌이라면 응당 문씨를 비아냥하는 댓글을 하나쯤 달아야하는 ‘놀이’로 바뀌었고, 급기야 네이버는 댓글 기능을 일시 정지시키기에 이르렀다.
지금 해당 기사는 삭제되고 없지만 네티즌들의 ‘성지순례’의 실체를 보여주는 한 장의 캡쳐화면이 남아 있다.
(http://blog.naver.com/mucarus님 블로그에서 인용)
댓글 기능을 정지시켰던 네이버가 다시 댓글 기능을 살려놓자 성지순례는 다시 이어졌고, 그 숫자는 30만개를 향해 가고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일반의 네티즌들은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의 댓글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는 상황이 생겨났다. 이것은 적어도 포털 사이트의 댓글이 토론을 통한 여론형성의 기능이나, 언론보도의 정확성을 따지는 감시기능과는 거리가 멀었음을 말해준다.
이같은 현상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어쩌면 네티즌들이 언론이 생산한 뉴스의 소비자 위치에 머물러 있는 한 위와 같은 형태가 보편적일지도 모른다.
수용자에서 비판자로 진화하는 네티즌
그러나 이런 댓글 만으로는 네티즌을 평가하는 것은 무리다. 대다수 언론학자나 평론가들은 네티즌들의 소위 ‘악성 댓글’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강하고 일반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네티즌을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고 할 수 없다.
적어도 오늘날 현실에서는 ‘네티즌=국민=일반대중’의 개념으로 바라봐야 한다. 즉 네티즌 자체가 바로 국민이라는 것이다. 악성 댓글이나 문희준씨의 사례와 같이 비난성 댓글 놀이에만 주목할 경우 네티즌은 ‘계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네티즌은 분명히 단순한 댓글놀이만 즐기는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더 나아가 명망가 중심의 언론감시 시민단체의 역할을 네티즌이 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게 옳아 보인다.
핵심은 오늘날 네티즌은 ‘언론보도의 수용자’에서 ‘비판자’로, 더 나아가 ‘언론인’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UCC(User Creative Contents)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UCC를 동영상에 국한하여 지칭하고 있지만, 실상 ‘언론’에 초점을 맞추어서 본다면는 UCC라는 개념은 ‘일방적인 수용자로서의 네티즌’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UCC는 네티즌이 직접 생산한 컨텐츠의 모든 것을 의미해야 올바른 해석이다. 이런 컨텐츠에는 동영상 뿐만 아니라 칼럼, 패러디, 댓글 등 모든 것이 포함되고, 언론으로서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네티즌이 언론보도의 감시자, 그리고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번 책에서는 언론의 왜곡보도에 네티즌들이 사실관계 확인 등을 통해 오보 혹은 왜곡보도를 바로잡았던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이같은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응하는 네티즌들의 촌철살인을 소개하고, 이어서 기성 언론의 왜곡보도를 비판하는 네티즌 칼럼을 살펴보겠다.
왜곡보도, 꼼짝마라
언론의 왜곡보도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 그런데 바뀐 게 있다. 과거에는 언론의 왜곡보도를 알 수가 없었다. ‘언론보도=진실 혹은 사실’로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국민들은 정보에 접근할 수 없었고, 일방적으로 언론의 보도를 수용해야만 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은 모조리 뒤집어 버렸다. 인터넷에는 세상 거의 모든 정보가 떠다닌다. 그리고 네티즌이 된 국민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정보를 접하게 되고, 이를 토대로 언론의 왜곡보도에 즉각 반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그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겠다.
문화일보 이미숙 기자, 연타석 홈런을 치다
2007년 5월 25일 울산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해군의 이지스 구축함인 ‘세종대왕함’ 진수식이 열렸다. 그리고 노대통령의 축하 연설이 있었고, 이를 보도한 문화일보 이미숙 기자의 기사가 네티즌의 엄청난 반발에 부딪치게 되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526010302231110010
이기자의 기사는 세종대왕함 진수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노대통령이 “정말 필요한 배일까?”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마치 노대통령이 필요하지도 않는 배를 만드는 게 아니냐고 의구심을 나타내는 제목이다. 만약 문화일보 기사만 본 독자들은 대통령을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실제로 일부 네티즌들은 이 기사를 통해 평소 노 대통령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출처 : http://polinside.tistory.com/3)
“저런 것이 어떻게 변호사를 하였을까?”, “그놈 주둥아리는 아무도 못말려”, “사시공부하면서 도적질까지 실습한 놈”, “한심한 개구리다..어케 대통령이됬는지” 등 기사 내용과 관계없이 악담을 퍼붓는 댓글이 달렸다. 일반인이었으면 모욕죄에 해당할만큼 악의적인 댓글이 달린 것이다.
그러나 이 기사는 포탈 사이트에 게시된지 한 시간이 채 못되어 네티즌들에게 최악의 왜곡기사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대통령의 연설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곧바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미숙 기자가 네티즌 사이에 스타(?)가 된 것은 물론이다.
먼저 연설 원문을 보자.
노대통령은 이미숙 기자가 보도한 바와 같이 “정말 이 좋은 배가 우리에게 필요한 거냐, 곰곰이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라는 발언을 하기는 했다. 이 문장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오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노대통령 연설의 진의는 이어진 문장에서 곧바로 나온다.
“그러나 아직도 이 동북아시아에 멈추지 않은 군비 경쟁이 있기 때문에 우리도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힘을 가지고 있더라도 스스로 힘을 함부로 쓰지 않으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평화를 지키고자 해도 스스로 평화를 지킬 능력이 없으면 평화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날 역사에서 우리가 얻었던 경험대로 이제 우리 스스로를 확실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춰 가야 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전투 능력이 오늘 이 이지스 구축함으로서 표현되는 거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종대왕함에 대해 “필요한 배일까?”라는 의구심을 나타낸 게 아니라 정반대로 대단히 기뻐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당일 대통령 연설은 K-TV를 통해 생방송되기도 했지만, 연설 전문이 곧장 공개되었기 때문에, 그 어떤 언론도 문화일보처럼 뻔히 드러나는 왜곡보도는 하지 않았다.
당시 네티즌들이 뜨겁게 반응한 것은 불문가지이다.
‘lovekall'이라는 네티즌이 문화일보 이미숙 기자의 기사에 댓글로 노 대통령의 축사 원문을 올리자 1만회를 넘기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이미숙 기자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급기야 앞서 소개한 가수 문희준씨의 사례처럼 소위 ’성지순례 놀이‘가 행해지기도 했다.
(원문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526010302231110010)
포탈 사이트의 해당 기사에만 머물지 않고, 해당 언론사인 문화일보를 직접 찾아와 기자에게 항의하는 열성까지 보여준 것이다. 급기야 네티즌들은 해당 기사가 나가기 얼마전에 이미숙 기자가 ‘최은희 여기자상’을 수상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를 환수해야 한다는 청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미숙 기자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나흘만에 이 기자가 쓴 또다른 기사가 네티즌의 도마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2007년 5월27일 청와대 윤승용 홍보수석은 KBS의 ‘단박 인터뷰’에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그 당시에는 ‘기자실 구조조정’이 논란이었던 상황이다. 그래서 윤 홍보수석이 TV 인터뷰에 출연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인터뷰 막바지에 진행자의 요청을 받고 자신의 애창곡인 가수 김현식씨의 ‘사랑했어요’를 불렀다.
이 사실을 보도한 문화일보의 기사를 보자.
(원문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53101030401001007)
이미숙 기자가 작성한 기사는 <윤승용 홍보수석 KBS TV 나와 노래>라는 주제목에, 부제목으로는 <‘통폐합’ 인터뷰중 애창곡 불러...한나라 “자중해야 할 판에..”>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 누가 보더라도 윤 홍보수석은 정신없는 사람 쯤으로 보일만한 제목이었다. 더 나아가 기사에서는 “뜬금없이 애창곡을 불러 빈축을 사고 있다”고 표현되어 있다. 이어진 기사에서는 “갑자기 노래를” 불렀던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이 기사 역시 악의적인 왜곡보도임은 금방 들통났다. KBS <단박 인터뷰>가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주는 요소가 바로 출연자에게 애창곡을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냥 지나칠 네티즌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진행자의 요청을 받아서 노래를 부른 것을 “갑자기”, “뜬금없이”로 표현한 것은 사실도 아니지만, 악의적인 왜곡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원문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53101030401001007)
댓글, 스타 댓글러를 만들어내다
네티즌들이 언론의 왜곡보도를 반박하면서 포탈 사이트에서는 ‘스타 댓글러’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네이버에서 활동하고 있는 ‘nicejisung'이라는 네티즌이다. 이 네티즌은 언론의 왜곡보도에 철저하게 사실로 맞서고 있어서 네티즌들의 호응이 굉장히 높은 스타 댓글러다.
nicejisung이라는 네티즌은 때로 언론의 왜곡보도를 글씨 몇 개만 바꾸어 통렬하게 반박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유신정권 이후의 5개 정부의 경제성적표를 비교한 문화일보 기사를 반박한 댓글이 손꼽힌다.
2007년 1월29일 문화일보는 한국은행과 통계청의 자료를 자체 분석해 역대 정부의 경제성장률, 일자리 창출, 민간소비증가율과 설비투자증가율을 비교했다.
(원문주소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129010301240530020)
(원문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129010305240530042)
문화일보 김병직 기자는 기사를 통해 유신정권 이후 노무현 대통령 집권 시기가 가장 경제성장률이 낮는 등 실적이 가장 저조하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기사는 nicejisung에 의해 여지없이 무너졌다. nicejisung은 ‘한나라당 정권이면 이 기사는 이렇게 바뀐다’는 제목의 댓글을 통해 기사를 반박했고, 네티즌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nicejisung은 댓글을 통해 문화일보가 인용한 통계는 물론이고, 문화일보가 인용하지 않은 통계까지 제시하며 역대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교하는 새로운 기사를 작성했다.
단순히 수치만 비교해서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다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같은 수준의 국가와 상대비교하는가 하면, 우리나라 경제의 위상을 감안하여 지표를 해석하는 등 ‘모범적인 기사쓰기’의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다.
nicejisung은 댓글을 통해 문화일보가 근거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용하며 노 대통령 집권 이후 기록한 4.2%의 경제성장률은 OECD 국가 중 경제성장률 5위를 기록한 것이며, 우리나라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국가 중에서는 1위라는 사실을 밝혔다. 또 취임 첫해 600포인트에서 출발한 주가지수는 1400선을 오르내리고 있으며, 수출은 2천억달러를 돌파한지 2년만에 3천억달러를 돌파한 사실도 제시했다.
nicejisung의 댓글은 단순히 통계 수치를 인용한 보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 것에만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일반 네티즌들의 기사 작성 수준이 기자들 못지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미국 백악관에 블로거가 출입기자로 등록한 사실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도 이미 일반 네티즌인 블로거들이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또한 직접 이메일 취재를 하여 양질의 기획기사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준에 도달한 상황이다.
nicejisung의 댓글은 네티즌들의 더 이상 언론보도를 수용하는 위치가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아도 손색이 없다. 이는 동시에 왜곡보도로 일관한 기성 언론이 신뢰를 상실한 수준을 넘어 네티즌의 도전에 직면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스타 댓글러’를 살펴보기로 하자. 앞서 언급한 nicejisung은 포탈 사이트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웹진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논객’으로 대우받고 있다. 물론 그 자신은 포탈 사이트의 뉴스에만 댓글을 달고 있지만, 그 댓글이 여기저기 퍼날라지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경향신문의 이상한 통계해석
통계를 인용한 왜곡보도의 사례로는 경향신문의 세계신문협회(WAN) 통계를 인용한 2007년 6월5일자 보도도 손꼽힌다.
경향신문은 <세계 신문구독 느는데 한국만 감소…정부 언론불신 조장>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세계적으로 신문 구독율이 늘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신문 구독율이 감소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이유는 정부가 언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기사에 따르면 2006년 전 세계 유료 신문 발행부수는 2005년에 비해 1.9% 증가했고, 무가지를 포함하면 4.3% 증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신문구독률은 34.8%로 5년전 51.3%에 비해 3분의 1 가량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줄어든 원인이 바로 정부가 언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원문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041831051&code=940705)
그런데 사실일까? 일단 정부가 언론에 대한 불신을 조장해서 구독률이 떨어졌다는 분석 자체도 문제지만, 이 기사는 기본적으로 인용한 통계부터 문제가 있었다. 이 역시 네티즌들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내어 밝혀진 결과다.
‘한우물’이라는 네티즌은 경향신문 홈페이지에 게시된 해당 기사에 단 댓글을 통해 사실관계를 바로 잡기도 했다. 그것도 경향신문이 인용한 WAN의 통계를 가지고 말이다.
(원문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041831051&code=940705)
‘한우물’은 인터넷에서 WAN 보고서 요약본을 찾아내어 경향신문이 통계조차 잘못 인용했음을 지적했다. 경향신문은 전 세계 유료신문의 발행부수는 1.9% 증가했다고 보도했지만 실제로는 2.3%였음을 밝혀냈다.
이 네티즌은 요약본 원문을 일일이 해석하며 기사의 왜곡보도를 지적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우리나라만 구독률이 감소한 것도 심각한 왜곡임을 밝혀냈다.
(원문 : 위와 동일)
한우물이라는 네티즌이 요약본을 해석한 것을 보면 우리나라만 발행부수가 감소한 게 아니라 조사대상 국가의 19%가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WAN의 통계에 따르면 아예 우리나라는 발행부수가 증가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것도 아시아에서 인도의 12.93%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10.59%의 증가율을 기록했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또 하나의 문제는 ‘발행부수’와 ‘신문 구독률’을 뒤섞어놨다는 점이다. 이 역시 ‘한우물’이라는 네티즌이 밝혀낸 사실이다.
이 네티즌은 경향신문 기사는 애시당초 WAN의 통계를 인용해 우리나라 신문의 ‘발행부수’가 감소했다고 소개했지만, 느닷없이 우리나라의 광고주협회 통계를 꺼내들면서 ‘신문 구독률’이 줄어들었다고 기사를 작성한 사실을 꼭 집어냈다.
이 기사가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은 건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바로 이런 기사 때문에 신문의 신뢰가 붕괴하고, 신뢰의 붕괴는 구독자 수 감소 및 구독률 저하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네티즌들은 언론의 왜곡보도가 나오면 “신문을 끊자”는 운동을 곧잘 펼치곤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과거에는 ‘조선일보’에 국한했지만 지금은 진보매체와 보수매체를 가리지 않고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경향신문의 이 기사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단순히 통계 왜곡에 국한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나라 언론 스스로 자초한 신뢰의 상실을 ‘정부 탓’으로 돌렸다는 점이다. 자기 반성이 있어야 할 기사에서 느닷없이 정부가 불신을 조장했기 때문에 신문구독률이 떨어졌다고 주장하면 누가 보더라도 받아들이기 힘든 주장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사는 기본적으로 언론 소비자들을 한심한 존재로 치부해버렸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경향신문의 해석을 뒤집어서 보면 우리나라 신문 구독자들은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으로 구독 여부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정부 혹은 타인의 판단에 좌우되는 사람이기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원문 : 위와 동일)
“구독수가 떨어지는 이유를 써놓고서도 모르네”라는 네티즌의 지적은 우리나라 언론 입장에서는 참으로 아픈 지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파야 하지 않을까?
독자를 숫자의 함정에 빠트리는 언론
사실 앞서 소개한 경향신문 기사 뿐만 아니라 통계라는 외피를 쓴 ‘숫자’를 통해 의도적인 기사를 작성하는 것 역시 우리나라 언론에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여기에 숨어있는 것은 애시당초 우리나라 언론에게는 유의미한 통계분석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일정한 목적을 갖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통계에만 관심이 있다는 얘기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해외순방에 관련된 통계 기사다. 2007년 2월13일자 동아일보는 <盧대통령 해외순방 역대 최다…23차례 49개국 방문>이라는 기사를 통해 마치 노대통령이 해외순방이나 다니면서 국민 세금을 많이 쓴 것으로 덧칠하는 데 성공했을지 모른다.
(원문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02130154)
이 기사는 일단 기사 제목 자체로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데 성공한 기사로 보인다. 23차례에 걸쳐 총 49개국을 방문해 ‘역대 최다’를 기록했는가 하면, 비용도 기사 작성 당시 620억원을 넘어서면서 역대 최다액수를 기록했다고 기사는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 기사의 진짜 목적은 기사의 뒤쪽 부분에 나온다.
(원문 : 위와 동일)
동아일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터키 코스타리카 필리핀 몽골 그리스 핀란드 뉴질랜드 스페인 등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 등 국제회의와 관련 없이 해당 국가 방문만을 목표로 찾았다.
...(중략)....
김 의원은 “대통령이 해외에 자주 나가 한국을 홍보하고 해외 시장을 개척하며 투자를 끌어 오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현안이 없는 나라를 찾는 것은 자칫 외유성으로 비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국제회의와 관련도 없이 해당 국가 방문만을 목표로 찾은 국가를 친절하게 일일이 거명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을 필두로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10개국을 거명했다.
그리고 동아일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자료를 건네준 한나라당의 김희정 의원 입을 통해서 밝혀놓고 있다. “현안이 없는 나라를 찾는 것은 자칫 외유성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이것으로 동아일보는 이미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외유성 해외 순방이나 많이 다니는 대통령’이 바로 그것이다. 동아일보의 해당 기사에 달린 댓글이 충분히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원문 : 위와 동일)
“이제 눈치들 채셨네. 대통령되기전에 외국구경못했는데. 국빈으로 공짜 세계여행이 어디여? 세계일주할 계획인데 국민들이 눈치를 챈것같아 좀 거시기 하지만 그래도 지금 안하면 언제하나. 계속 돌아봐야지ㅎㅎㅎㅎㅎㅎ”
“시골 촌놈으로 태어나서 세상구경해보는것이 꿈이엿기에 국민을 기만해서 얼렁뚱땅 권좌에오르니 내돈안들이고 국민의혈세로 공짜구경하면서 헛소리하고 돌아다녀도 어리섞은 백성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바없구나.....노무현이망상시집에서....”
그런데 동아일보의 목적을 좌절시킨 것 역시 네티즌이었다. 인터넷 정치웹진 <서프라이즈>의 ‘까치밥’이라는 필명의 네티즌은 동아일보의 의도적인 통계 인용 보도를 반박했다.
동아일보가 역대 대통령의 해외순방 방문 횟수와 국가 수, 그리고 비용을 절대 비교한 것에 대해 시대별 물가수준까지 동원해 반박한 것이다. 먼저 이 네티즌이 만든 표를 보자.
노태우 대통령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해외순방횟수와 비용을 비교하고, 그리고 물가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즐겨먹는 새우깡을 기준으로 했다. 비단 새우깡 뿐만 아니라 물가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은 굳이 통계가 필요없을 정도로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더구나 새우깡은 가격이 별로 오르지 않은 제품에 속한다.
숫자만 비교하면 노 대통령이 해외순방 횟수도 가장 많고(김대중 전 대통령이 23회로 가장 많지만, 이는 기사 작성 당시 기준이기 때문에 퇴임할 때까지를 고려하면 노 대통령이 가장 많아지게 된다), 비용도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까치밥’이 만든 표를 보면 동아일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외순방 횟수와 총 비용을 비교할 경우 한번 순방 나갈 때 사용한 액수가 나온다. 일단 물가를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노 대통령은 회당 평균 24억 조금 넘게 사용한 셈이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회당 45억원, 김영삼 전 대통령은 37억원, 김대중 전 대통령은 26억원 가량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물가수준을 반영하게 되면 노 대통령이 가장 알뜰하게 해외순방을 다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까치밥’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노 대통령, 해외순방 역대 최다, 비용은 역대 최소”
통계를 이용한 기사 작성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좋은 수단으로 곧잘 활용되는 게 우리나라 언론이다. 그런데 앞서 경향신문의 신문 구독률과 신문 발행부수 통계를 인용한 기사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언론의 신뢰만 추락시킬 뿐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뛰어난 글솜씨는 물론이고, 다양한 분야에서의 전문성으로 무장한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활동하는 상황에서 동아일보의 목적지향적인 기사작성은 살아남기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퍼나르기를 통한 전파 확산이 용이한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언론의 통계를 인용한 왜곡보도 혹은 이미지 덧씌우기는 금방 들통날 뿐만 아니라 언론의 신뢰 추락을 가속화할 것이 자명하다.
걸려도 또 쓴다. 계속되는 외신 왜곡보도
우리나라 언론은 통계를 이용한 왜곡보도도 많이 하지만 외신을 이용한 왜곡보도도 못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민들이 언론보도 외에는 딱히 정보를 접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언론보도=사실=진실’로 통용되었 듯이 외신을 인용한 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외신의 경우 그 출처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어서 감히 언론의 외신 인용보도는 검증 자체가 불가능했다. 더 나아가 외신 뿐만 아니라 외국 정치인들의 발언은 사실 해외특파원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소지도 다분했다.
서두에서 프랑스의 <르 몽드> 기사를 오역한 조선일보에 대해 김정란 상지대 불문과 교수가 조목조목 반박한 기사를 소개한 바 있지만 이같은 외신의 왜곡인용 혹은 의도적인 오역(誤譯)으로 대표적인 사례는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현 조선일보 고문)이다. 1997년 12월24일자 조선일보 1면에 <긴급제언-즉각 실천해야 한다>라는 제목으로 실린 김주필의 글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를 향한 ‘경고’에 다름 아니었는데, 그 근거가 바로 <월스트리트저널>이었다.
당시는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외환위기가 터진 시기였다. 당연히 외화가 필요한 때였고, 김주필은 우리나라가 외국으로부터 돈을 꿔와야 하는 상황이지만 어려움에 처해있다면서 그 첫 번째로 김대중 당선자를 꼽았다. 그 근거가 바로 같은 해 12월22일자 <월스트리트저널>이었다.
김주필 자신의 주장을 <월스트리트저널>이라는 서방 세계의 신뢰도가 높은 언론의 목소리를 빌려서 대통령 당선자에게 경고를 보낸 것이다.
당시 김주필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미국의 언론들은 김대중 당선자를 아직도 의혹의 눈초리로 보고 있다. 12월 22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은 김 당선자를 가리켜 ‘인기주의자(populist)’ ‘예측하기 어려운(unpredictable) 정치인’이라고 표현하고 그의 경제정책을 ‘근거없는(unfounded)’ 것으로 보고 있다.
심지어 그의 측근들을 ‘인기 위주의 국회의원과 좌파 성향의 학자’로 규정하고 있다. 미국 월가의 교과서나 다름없는 이 신문의 이런 성격 규정은 그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김 당선자와 그의 정부 그리고 한국에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김주필이 인용한 외신 기사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는 정말 위험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셈이다. 외환위기로 나라가 파산선고를 받기 직전인데, 대통령 당선자 때문에 돈을 빌려올 수 없다니 큰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김주필의 외신 인용은 거짓으로 들통이 났다. 주인공은 <딴지일보>였다.
(원문 : http://www.ddanzi.com/articles/article_view.asp?installment_id=206&article_id=3189)
<[신간안내] 김대충, 새로운 영문법자습서 발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글은 무려 9개월이 훨씬 지난 김주필의 외신 오역을 바로잡기 위한 글이었다.
<딴지일보>는 이 글을 통해 김주필이 외신을 어떻게 입맛에 맛게 자의적으로 해석했는지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그 대상이 바로 앞서 김주필이 외신을 인용한 부분이다. ‘인기주의자(populist)’, ‘예측하기 어려운(unpredictable) 정치인’, ‘근거없는(unfounded)’이라고 해석한 부분을 통렬하게 반박하고 있다.
(원문 : 위와 동일)
김주필이 ‘인기주의자’로 해석한 populist가 실제로는 ‘인민주의자’라는 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더구나 <월스트리트저널>은 기사에서 김주필이 해석한 것처럼 ‘인기주의자’로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이어 <딴지일보>는 ‘근거없는’으로 해석되는 ‘unfounded’에 대해서도 김주필이 의도적으로 주어를 생략해서 김당선자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웠음을 고발한다. 즉 김주필은 “그의 경제정책을 ‘근거없는(unfounded)’ 것으로 보고 있다.”고 해석했지만, <월스트리트저널> 기사 원문은 “DJ의 경제정책에 대한 우려는 틀림없이 근거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김주필은 주어에 해당하는 ‘우려’(Concerns)를 빼놓고 해석한 것이다.
압권은 ‘예측하기 어려운(unpredictable) 정치인’이라는 부분이었다. <월스트리저널> 기사 원문에는 unpredictable이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딴지일보>의 이 기사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우리나라의 무분별한 외신 인용은 물론이고, 의도적인 왜곡인용 혹은 오역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외신오역은 여전하다. 그리고 외국 정치인들의 발언조차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런데 10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냥 넘어갈 네티즌이 아니다.
부시 발언 왜곡했다가 한 시간도 못넘기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여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2006년 10월11일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은 부시 미국 대통령의 기자간담회 발언을 자세히 소개했다. 문제는 중요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참여정부와 미국의 불화를 끊임없이 부채질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 목표는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로 이어지는 대북화해정책 흔들기였고, 어떻게든 미국과 참여정부 사이가 멀어져야만 했다.
아쉽게도 최초 보도 내용이 담긴 PDF 파일은 찾지 못했지만, 그 내용은 남아 있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1면에 게재된 ‘부시 “모든 국가가 심각한 조치 취해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부시 대통령은 회견 모두 발언에서 북한의 위협에 강력한 비난과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중국과 러시아, 일본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으나, 한국은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기사를 읽으면 단박에 미국이 한국 정부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일보 보도는 의구심을 갖고 부시 미 대통령의 발언 원문을 찾아나선 네티즌에 의해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당시 어떤 네티즌은 한국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부분의 원문을 찾아내어 조선일보가 악의적인 왜곡보도를 하고 있음을 지적했고, 이러한 사실은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조선일보는 기사를 재빨리 고쳐써야 했다.
미 백악관이 10월11일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부시 대통령의 발언 원문은 다음과 같았다.
(원문 : http://www.whitehouse.gov/news/releases/2006/10/20061011-5.html)
“I thank China, South Korea, Japan, and Russia for their strong statements of condemnation of North Korea's actions.”
한국이 분명히 표기되어 있다. 워싱턴 특파원으로서 부시 연설을 현장에서 들었을 것이 분명한데 왜 ‘South Korea'가 빠지게 되었을까?
더구나 당시 연합뉴스는 “한국과 중국, 일본..”으로 표현하며 우리나라가 포함된 사실을 정확하게 보도하고 있다. ‘2006-10-12 01:11 송고’로 표시된 기사 입력 시간을 보더라도 우리나라와의 시차를 고려하면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워싱턴 현장에서 기사를 송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을 유독 ‘South Korea'만 듣지 못했을까? 왜 보지 못했을까?
어찌됐든 유독 우리나라만 빠진 사실 자체가 네티즌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네티즌은 백악관 홈페이지를 뒤져 원문을 찾아내어 조선일보 보도가 허위임을 밝혀내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조선일보는 그 다음날인 2006년 10월13일자 2면에 정정기사를 내보내야 했다. 조선일보는 ‘바로잡습니다’를 통해 “12일자 A1면 서울 일부지역 배달판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 기자회견 기사 중 ‘부시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에 강력한 비난과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중국과 러시아, 일본 정부에 감사한다고 말했으나, 한국은 언급하지 않았다’고 보도됐으나 한국을 언급한 것으로 확인돼 바로잡습니다”라고 보도했다.
그냥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기사이기도 했다. 어쩌면 조선일보는 독자들이 대충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 네티즌은 세계에서 가장 참여정신이 높다는 사실을 몰랐던 모양이다.
‘독재자의 딸’, 외신은 정말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나라 언론이 외신을 인용보도하면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과거에는 일반 국민들이 외신을 직접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든, 엉터리로 해석을 하든 검증을 받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외신보도 원문을 찾아서 제대로 번역을 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독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그렇게 쓸 시간이 많지도 않지만, 대충 기사의 맥락만 훑어보고 지나가는 수준에서는 꼼꼼히 따져봐야 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그런데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네티즌들이 다양한 형태의 도구를 이용해 UCC를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근본적인 변화가 오고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UCC는 직접 제작하는 동영상에 국한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이는 칼럼, 세상을 유쾌하게 비꼬는 패러디, 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항하는 댓글과 칼럼 등 이 모든 것들이 해당된다.
그리고 이런 UCC 그 자체가 언론기능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는 언론보도의 소비자로 국한된 지위에서 스스로 벗어나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외신도 이제는 더 이상 언론사와 기자들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재료가 아니다. 앞에서 얘기한 사례들이 대표적인 것들이기도 하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례가 있다. 이것은 사실상 ‘취재행위’와도 같은 것인데, 취재라는 것이 기자들만 할 수 있는 전문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2007년 6월2일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참평포럼 제1차 월례강연회 강사로 초청돼 강연을 했다. 이날 노 대통령은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지칭해 ‘독재자의 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주목할 부분은 노대통령 자신의 표현이 아니라 ‘외신에서 그렇게 나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이 발언이 나오자 네티즌들은 곧장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외신들이 그렇게 표현했었거나 표현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의 TIME지, 영국의 BBC방송 등 많은 외신들이 ‘독재자의 딸’로 지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는 점이다. 그것도 특정 네티즌이 혼자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 외신을 뒤지고 다니면서 번역문까지 올리기도 했다.
원문 : http://news.bbc.co.uk/2/hi/asia-pacific/5040964.stm
원문 : http://economist.co.uk/world/asia/displaystory.cfm?story_id=3997995
원문 : http://www.iht.com/articles/2006/06/28/news/park.php
원문 : http://query.nytimes.com/gst/fullpage.html?res=9C0CE2DC1738F93BA25756C0A9649C8B63
이같은 네티즌의 행위를 놓고 일부에서는 극성맞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같은 관점은 ‘민주주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민주주의는 주권자들이 참여해야 실현 가능한 원리다. 바로 이런 원리가 언론이라는 분야에서 구현되는 하나의 양태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참여민주주의로 명명될 수 있는 것이며,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큰 흐름이 되어버렸음을 인정해야 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언론에 국한해서 본다면 네티즌들이 직접 외신 기사를 찾아서 올리고, 궁극적으로는 퍼즐맞추기 하듯이 여러개의 외신을 모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내는 과정이야말로 ‘취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비로서 네티즌들의 행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포털, 너희들도 꼼짝마
네티즌들이 언론만 감시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제는 포탈 사이트 감시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현실 속에서는 언론의 개념이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게 바로 포탈 사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포탈 사이트의 뉴스 편집기능이 법률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실제로 이러한 문제를 오래전부터 예견하고, 감시한 것은 언론학자나 시민단체, 그리고 언론사와 기자가 아니라 평범한 네티즌들이었다.
네티즌들이 포탈 사이트의 편집을 감시하며 이를 추궁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연설에 관한 기사가 손꼽힌다. 당시 네이버의 경우 연합뉴스가 송고한 기사를 메인 기사로 올렸는데, 노대통령의 연설에 대해 네티즌들의 우호적인 댓글이 2천여개가 달리자 똑같은 기사를 제목만 바꿔 교체하는 일이 일어났다. 기사는 물론이고 네티즌들이 달았던 댓글도 모조리 사라져버린 것이다.
원기사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기사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만 덩그러니 나타난다.
당시 노 대통령의 신년연설을 굉장히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제목의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 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동시에 네티즌의 항의를 많이 받았던 것은 <노대통령 "민생문제 '만든' 책임은 없다">는 제목이었다.
얼핏 제목만 보면 굉장히 무책임한 대통령으로 비춰질 수 있는 제목이다. 실제로 이렇게 반응하는 네티즌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네티즌들은 기사 제목 변경을 요구했다. 담당 기자에게 항의 메일을 보내는 네티즌도 있었다.
사실 당시 연합뉴스 기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었다. 기사 자체는 연설 내용을 충실하게 보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제목이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하여간 네티즌들의 항의가 이어진 것은 포탈 사이트에서 최초에 올린 기사를 삭제하면서 네티즌들의 심기를 건드려놓은 상태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2천여개에 달하는 댓글과 기사가 사라진 상황도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대통령의 발언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목으로 기사를 교체했으니 가만 있을 네티즌이 아니었다.
그 결과 기사는 다시 교체됐다.
금방 느낄 수 있지만 기사 제목에서 커다란 차이가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그냥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네티즌들이 포탈 사이트의 편집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기사가 바뀌는 과정을 지켜본 네티즌들이 그냥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다.
소비자가 똑똑하면 제품의 품질이 좋아진다는 사실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포탈 사이트의 대통령 신년연설 편집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과정도 소비자가 어떻게 제품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언론과 포탈사이트의 보도와 편집행위 역시 하나의 제품에 해당하고,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참여하면 제품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일상 경제생활에서도 불량품을 구입하거나 허위 과장광고에 속아서 잘못된 제품을 구매했을 경우 환불은 물론이고 손해배상 책임까지 묻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걸 우리는 ‘소비자 주권운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언론에서의 소비자 주권운동이 바로 이런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언론이고, 어디까지 언론에 포함될까?
이 지점에서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를 던져보고자 한다. 우리가 보통 ‘언론’이라고 할 때는 신문과 방송을 주로 지칭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신문과 방송에 국한하는 언론의 개념은 대단히 협소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온 언론에 대한 개념부터 살펴보자.
언론 言論 [명사]
1 개인이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 일. 또는 그 말이나 글.
2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
우리가 지금까지 사용한 언론의 개념은 아마도 2번에 해당할 것이다. 신문과 방송 등 매체의 보도, 그런 매체에 자신의 주장을 담은 글을 게재하는 행위 등 인터넷이 등장하기 이전의 우리나라 언론환경을 적용하면 들어맞는 개념이다.
그러나 백과사전이 언론을 규정하면서 ‘개인이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 일. 또는 그 말이나 글‘을 1번에 위치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2번으로 국한해서 언론이라 규정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원래의 언론 개념은 1번이 맞지 않을까? 필자는 서두에서부터 네티즌들의 각종 UCC가 언론행위라고 규정지었는데, 사전에서 규정한 개념을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불특정 다수는 물론이고 특정인을 향한 모든 말과 글은 언론이라고 규정해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기존의 신문과 방송 뿐만 아니라 포탈 사이트의 뉴스 편집행위, 네티즌들의 각종 UCC도 언론의 개념 범주에 당연히 포함해야 한다. 정치인과 경제인들의 발언 역시 언론행위에 포함된다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기자’라는 직업의 개념 규정도 새롭게 해야할 필요성이 동시에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부의 기자실 구조조정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또한 기자실 구조조정과 맞물려 이슈가 되었던 시사저널 사태도 좋은 사례가 아닐까 한다. 이 두 가지 문제에 관한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과연 언론은 무엇이고, 언론의 자유란 무엇이며, 기자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기자실, 언론의 자유와 상관있을까?
2007년 5월 정부에서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을 내놓으면서 기존의 기자실을 통합형 브리핑룸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히자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각종 논리가 등장했음은 두 말 할 나위가 없었고, 가장 핵심적인 반대논리는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자유’였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무수하게 쏟아지는 언론보도에 냉정했다. 오히려 언론의 주장을 조목조목 비판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기자실을 브리핑룸으로 전환하는 것이 ‘국민의 알권리’, ‘언론의 자유’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따지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다양한 논리들이 개발되고, 전직 기자출신들은 자신의 경험담을 쏟아내며 정부 방침의 정당성을 뒷받침했다.
위와 같이 기자실의 폐해를 지적하는 네티즌의 댓글에 달린 댓글 역시 폭발적이었다.
취재지원선진화방안을 둘러싼 논쟁에서 눈여겨 볼 부분이 있다. 이 논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이기도 한데,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제도권 언론 vs 네티즌 등 비제도권 언론’ 간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단순히 네티즌들이 정부의 취재지원선진화방안에 대해 의견을 표명한 수준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것이며, 우리나라 언론의 구조와 틀을 놓고 ‘제도권 언론과 기자’와 ‘비제도권 네티즌’이 근본적인 지점에서 충돌하는 역사적인 분수령으로 기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당시 정부의 조치에 진보와 보수를 자처하는 제도권 언론은 물론이고,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불문하고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불과 두 달을 약간 넘긴 기간동안 2천5백여건에 달하는 기사를 쏟아냈고, 어림잡아 하루 평균 35~40건에 달하는 기사로 정부의 방안에 대해 그야말로 융단 폭격을 감행했다.
이렇듯 일방적인 싸움의 와중에 대다수 네티즌들은 제도권 언론과는 정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와중에 포탈 사이트의 편파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언론의 반발을 비판하는 네티즌들의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앞서 소개한 노무현 대통령의 신년연설 기사를 둘러싼 포탈과 네티즌의 공방이 재연된 것이다. 기사를 바꿔 버리는 것이다.
메인 기사가 바뀌면 네티즌들은 포탈 사이트 운영자에 대한 항의를 잊지 않는다. 왜냐하면 편집권을 이용해 네티즌들의 의견을 모아가는 공론화를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바꿔치기한 기사부터 보자.
이 기사 자체를 놓고 논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밑에 달린 댓글을 보면 폭발적으로 댓글이 달리면서 의견을 모아가는 과정에 있었던 기사를 사라져버리게 만들고 새로운 기사, 특별히 새로운 내용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기사로 바꿔치기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댓글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원래 메인 기사를 바꿔치기 하기 전에는 어땠을까? 마침 어떤 블러거가 자료를 보관해놓았다.
그림을 보면 443개의 댓글이 달렸고, 베스트로 선정된 댓글의 경우 조회수가 1466회를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707개의 추천을 받았고, 그 댓글에 달린 댓글이 무려 136개다.
사실 포탈 사이트의 기사에 달린 댓글은 여론을 수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양한 의견을 내놓으면서 추천을 많이 받으면 베스트 댓글로 선정되어 많은 네티즌들이 접할 수 있도록 노출된다. 베스트 댓글이 선정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의견이 수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해당 기사를 메인에서 감춰버린다. 특별히 다르지 않은 내용의 기사로 말이다.
위의 그림에서 세 번째 베스트 댓글을 보면 ‘아싸 네이버 메인기사 또 바꾸고 ㅋㅋ’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미 기사를 한번 바꿔치기 한 적이 있다는 얘기다. 그 바꿔치기한 기사에 저렇게 많은 댓글이 달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위의 기사도 또다시 화면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기사로 교체된다. 그게 바로 맨 앞에서 소개한 기사다.
포탈 사이트의 편집권에 대한 문제를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네티즌은 포탈 사이트의 편집권 역시 언론행위로 보고 있으며, 자의적인 편집권 행사에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네티즌들은 이를 명백한 언론행위로 받아들이고 마치 숨바꼭질하듯이 잡아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시사저널 사태를 외면했던 언론이 ‘언론의 자유를 외치다
정부의 취재지원선진화방안에 대해 제도권 언론이 거세게 반발한 사실은 이미 말했다. 그 일환으로 기자협회 소속 37개 서울지역 언론사 기자들이 청와대를 항의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와 ‘국민의 알권리’를 내세우는 성명서도 발표했다.
그러자 앞서 스타 댓글러로 소개했던 nicejisung이라는 네티즌은 통렬하게 기자들의 행태를 비판했다.
‘니들을 보니 정말 눈물이 다 나온다’는 제목의 댓글은 무려 14,806회의 조회수에 1740명의 추천을 받았고, nicejisung의 댓글에 달린 댓글 또한 무려 943개나 달리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nicejisung은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국민의 알권리를 외치며 정부의 취재지원선진화방안에 저항하는 제도권 언론과 기자들이, 정작 언론의 자유가 침해받고 있었던 시사저널 사태에 침묵한 사실을 들어 위선적인 행태를 통렬하게 공박한다.
잠깐 내용을 소개한다.
니들이 지금 언론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가야 할 곳은 청와대가 아니라, 바로 이 시간에도 차가운 길바닥에서 진짜 언론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시사저널 기자들의 농성장이란다.
기자들이 양심에 따라 쓴 기사를 폭력적으로 삭제한 사주의 언론탄압에 맞서 지금도 하루 하루 눈물겹게 싸우고 있는 시사저널 기자들이 니들 눈에는 안 보이니?
한겨레신문 정도를 제외하고, 자기네 기자 동료들이 진짜 언론탄압을 당하고 있는 현장은 애써 외면했던 놈들이....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선 기사 한 줄 쓰지 않던 놈들이..... 청와대가 언론탄압을 한단다.
아.... 니들 하는 짓거리를 보니 진짜 눈물이 날려고 한다.
청와대가 단 한번도 니들을 권력기관을 이용해 협박을 한 적이 있던가?
청와대가 단 한번이라도 니네 기자들을 따로 만나 촌지주고 양주 먹이며 회유한 적이 있던가?
진짜 용기가 필요했던 시대엔 권력에 투항했던 놈들이... 진짜 언론탄압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엔 눈을 감는 놈들이.....
이 댓글은 네티즌의 상식을 보여준 최고의 댓글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이기도 하다.
취재지원선진화방안을 둘러싼 논쟁은 크게 두 가지 시사점을 우리에게 던져줬다.
첫 번째로는 네티즌의 등장으로 인해 이미 ‘제도권 언론과 기자’ vs ‘비제도권 네티즌’ 간에 상호 대립 및 보완 관계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이는 네티즌들이 일방적으로 제도권 언론이 생산한 기사를 수용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언론의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여론형성에 대항하여 자체적인 여론형성 기능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네티즌이 더 이상 그냥 네티즌이 아니라 ‘언론’ 그 자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도권 언론 vs 네티즌’ 간의 싸움 와중에 포탈 사이트도 일방적으로 제도권 언론의 편을 들면서 공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포탈 사이트가 본격적으로 네티즌의 감시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언론의 개념’이 자연스럽게 확장되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부연해서 말하면 앞서 사전적인 의미의 ‘언론’ 개념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을 가진다면 언론, 그리고 기자로서의 지위를 자연스럽게 획득하게 된다는 걸 말한다.
이는 곧 제도권 언론이 더 이상 ‘언론과 기자’라는 타이틀과 기득권을 내세워 여론을 좌지우지 할 수 없음을 의미하며, 수백, 수천만명에 달하는 비제도권 언론과 기자라고 할 수 있는 네티즌과 경쟁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소개한 사례들은 바로 그 경쟁이 이미 시작됐음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네티즌을 언론으로 인정한 미디어다음의 실험
사실 네티즌들은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다. 그래서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 워’ 논란에 있어서도 네티즌들은 함부로 애국주의를 들먹이며 수준을 낮춰보는 행태에 반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형 포털사이트에서 의미있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의 길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로 다음커뮤니케이션즈의 미디어다음이다.
간단하게 규정하면 미디어다음은 네티즌을 언론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두에서 시민기자제를 도입한 오마이뉴스를 거론했지만, 오마이뉴스 또한 기자들 중심으로 뉴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매체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다음 아고라는 이를 뛰어넘었다.
미디어다음 홈페이지를 보자.
메뉴 구성을 보면 ‘미디어다음’은 언론사가 생산한 뉴스와 미디어다음이 자체적으로 생산한 뉴스를 유통하는 공간이다.
주목해야 할 코너는 ‘아고라’, ‘세계엔’, ‘블로거뉴스’다. 이 코너들은 네티즌, 그리고 블로거들이 직접 뉴스를 생산하고, 토론에 참여하고, 동영상과 패러디를 만들어 유통하는 공간이다. 네티즌을 전면적으로 언론인으로 인정한 것이다.
‘아고라’에서는 각종 이슈를 놓고 토론이 펼쳐진다. 댓글토론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재치넘치는 패러디가 유통된다. 그리고 네티즌 청원을 통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제도를 건의하기도 한다.
‘세계엔’은 세계 각국에 거주하고 있거나 여행을 다녀온 네티즌들이 다양한 주제의 글을 올리며 세계에 대한 안목을 넓혀나간다. 세계 각국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유학정보, 트랜드를 자발적으로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한다.
뭐니뭐니해도 미디어다음의 꽃은 ‘블로거뉴스’가 아닐까한다. 미디어다음의 블로거기자단에 가입한 블로거들이 기자가 되어 뉴스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2003년 네티즌의 토론과 참여를 통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며 오픈한 미디어다음의 목표는 무난하게 달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미디어다음의 블로거뉴스는 네티즌들이 기자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반을 통해 네티즌들은 기성언론에 느꼈던 갑갑함을 털어내고 왕성한 기자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의 댓글토론이나 정치웹진에서의 칼럼을 뛰어넘는 형식과 내용을 갖췄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네티즌, 기성언론을 대신해 기사를 쓰다
현대사회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갖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언론은 바로 그런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하고, 이를 통해 제도를 개선하거나 불특정 다수인들의 주변을 돌아보게끔하는 예방활동에도 도움을 준다.
특정 사례들이 반복될 경우 사회적 이슈가 되어 토론에 부쳐지거나 공론화 과정을 거치고, 국회나 정부기관을 움직이게끔 한다.
이러한 역할을 독점했던 것이 바로 언론이다. 이를 뒤집어서 보면 언론이 침묵하면 어떤 현상이 반복되더라도, 그 반복된 현상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가 되더라도 이슈가 되지 않고, 제도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론이 뉴스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로거뉴스는 누구가 자신이 겪은 일, 혹은 자신이 목격한 현상을 소재로 뉴스를 생산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리고 수많은 일반인들, 즉 네티즌들은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뉴스의 소비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생산자로 나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질은 ‘참여’다. 뒷짐지고 언론이 생산해주는 뉴스만 소비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직접 ‘참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정치영역에서 주권자의 적극적인 참여의지가 각종 선거결과나 정책결정에 큰 영향을 미치듯이, 언론영역에서도 적극적인 참여로 큰 변화가 생겨날 가능성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포탈사이트 다음이 블로거뉴스를 도입한 것은 2005년 말쯤이다. 이미 미국에서는 블로거 기자가 백악관을 출입한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블로그 열풍이 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미디어다음이 도입한 블로거뉴스의 블로거기자단은 개인 미니홈페이지 정도로 치부되던 블로그를 ‘언론’측면에서 주목한 결과물이다.
이동통신사 문자서비스를 이용한 결제사기범죄 밝혀낸 ‘성난바다’
2005년 11월21일 다음 아고라에는 블로거기자단에 가입한 ‘성난바다’의 고발 기사가 올랐다. 이 기사는 순식간에 조회수 30만에 육박하는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원문 : http://blog.daum.net/being8/5208444 )
이 기사는 일상 생활에서 겪은 일을 토대로 직접 기사를 생산한 뉴스다. 휴대폰 소액결제의 경우 본인에게 승인번호를 보내주어 이를 확인한 다음 결제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성난바다’라는 네티즌은 자신이 결제하지도 않은 10만원을 모 사이트에서 결제된 것을 통보받았고, 이를 추적한 결과 자신이 이용하는 이동통신사 고객센터와 통화하던 중 불러준 승인번호를 통해 사기범죄가 이루어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네티즌은 자신이 사기범죄를 당하게 된 모든 과정과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이동통신사들의 횡포와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냈다. 그리고 블로거뉴스로 올린 것이다.
지금 여기서 ‘성난바다’라는 네티즌이 해결한 소비자피해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블로거뉴스가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말하고자 함이다.
기존에는 자신이 겪은 일을 언론사에 제보하여, 해당 언론사에서 기사로 채택해주어야만 널리 알려질 수 있었지만 이제는 기성 언론사를 통하지 않고 곧장 사회이슈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성난바다’라는 네티즌의 기사는 웅변하고 있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전세계에 흩어져있는 블로거들이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기성 언론에서 찾을 수 없었던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혁명적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다양한 정보만큼이나 다양한 시각으로 사물과 현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점이다.
기성언론의 일방적인 시각과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유통구조의 독과점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기성언론에게는 심각한 위기요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제로 기존의 신문과 방송은 ‘신뢰의 붕괴’라는 위기에 봉착해있다.
‘안티조선운동’, 그 노력의 결실을 맺기 시작하다
네티즌들이 직접 뉴스의 생산자로 나서게 된 것은 다양한 배경이 뒷받침되고 있다. 앞서의 미디어 다음의 블로거기자단도 하나의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블로거기자단 같은 경우는 어쩌면 수단이나 도구 측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오히려 본질적으로는 기존 언론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인식의 확산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안티조선’으로 상징되는 언론을 상대로 한 네티즌들의 언론개혁운동이 일정 정도 성과를 보고 있다고 해석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안티조선은 단순히 조선일보를 반대한다는 의미로 축소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오히려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친일언론, 그리고 그 친일언론이 독재정권의 나팔수로, 또 다시 민주화 이후에는 수구보수세력의 정권찬탈을 목적으로 온갖 종류의 곡학아세와 왜곡보도로 얼룩진 역사의 청산으로 확대해석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더 나아가 ‘언론보도=진실’로 인식하던 대중들의 인식에 변화가 생기면서 기성언론의 신뢰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공유를 통해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나간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모두 홈페이지)
여기서 안티조선운동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다. 일방적인 뉴스의 소비자였던 일반대중, 즉 네티즌들이 보여준 인식과 행동의 변화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언론의 보도를 무조건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이던 시대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이 과정을 설명할려면 안티조선운동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안티조선운동이 언론보도의 신뢰에 심각한 문제제기를 한 사실상의 첫 번째 사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조중동은...
언론의 신뢰가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보여주는 네티즌의 재미있는 놀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 제목이 바로 ‘다음날 조중동은’이다.
‘다음날 조중동’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등장 이후 모든 사안을 노무현 대통령의 탓으로 돌리는 ‘노무현 탓’, 그리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스스로 했던 말도 노무현 대통령이 하게 되면 무조건 반대를 하는 행태를 통렬하게 꼬집은 일종의 ‘놀이’였다.
동시에 우리들 앞에 벌어지는 각종 현상을 교묘한 말장난으로 충분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울 수 있음을 네티즌들은 놀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음날 조중동은’으로 붙여진 놀이는 최초에 글로 시작되어 그림으로 이어지게 된다.
예수를 등장시킨 ‘다음날 조중동은’ 언론이 한 사람의 발언과 생각을 어떻게 왜곡시킬 수 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한국 언론의 신뢰가 이미 돌이키기 힘든 정도로 신뢰가 무너졌음도 보여주고 있다.
몇 개 더 보자.
철학자인 스피노자의 유명한 명언도 한국의 보수언론이라면 충분히 저런 식으로 왜곡할 수 있음을 통렬하게 비꼬고 있다.
‘다음날 조중동은’이라는 놀이는 끊임없는 패러디로 이어졌다. 현재로서는 총 몇 개의 패러디가 생산되었는지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다.
여기서 참여정부의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패러디를 하나 소개한다. 2007년 한국을 뒤흔들었던 개헌논의에 대한 패러디다.
2007년 1월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와 관련해 개헌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각각 임기 5년과 4년으로 되어있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동일하게 맞추어 안정적인 국정운영 기반을 갖추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특히 2008년 2월에 대통령의 임기가, 같은해 4월에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기 때문에 동일한 임기로 맞출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부연 설명하기도 했다. 2007년에 개헌을 추진해서 2008년부터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를 맞추어놓지 않으면 20년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배경설명도 있었다.
그런데 모두 알다시피 거의 모든 언론과 정당들이 “왜 지금이냐”는 논리로 개헌안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국민의 여론은 팽팽했다. 지속된 언론의 개헌반대 보도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이 팽팽했다는 것도 실로 대단한 일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짚어야할 점은 거의 모든 언론이 몇 년전부터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각종 사설과 기사, 칼럼을 통해 주장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막상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하자 반대입장으로 돌변한 것이다.
그러자 개헌논란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패러디가 나왔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조중동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왔을지에 대한 비꼬는 패러디였다.
패러디는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선거가 있는 2007년에 개헌을 제안하면 정략적이라는 비난이 있을 거 같아 다음 정권으로 미루겠다는 가정을 도입했다. 이 가정은 그냥 가정이 아니라 노대통령이 개헌을 제안했을 당시의 실제 언론과 정치권의 반응이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로 노대통령이 다음 정권으로 개헌을 넘길 경우의 조중동 반응을 패러디한 것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의 논리를 생산해내는 한국 언론의 추한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져있는 패러디가 아닐 수 없다.
개헌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언론이 사실 바닥을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 바꾸기의 극치를 달렸기 때문이다. 정말 오래전 과거에 우리나라 언론이 어떻게 보도했는지 차치하더라도 아래 그림을 보면 그리 먼 옛날 얘기도 아니다.
그런데 거의 하루 아침에 입장을 바꾼 것이다. 우리나라 언론이 이 정도 지경에 이르다보니 패러디가 봇물처럼 나오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현상이다.
‘다음날 조중동은’에 등장한 다양한 패러디를 잠깐 소개한다.
한석봉 어머니편
"자 이제 글을 써 보거라, 난 떡을 썰 것이다"
다음날 조중동은...
"한석봉 어머니... 독한 어머니의 표상... 파문 확산"
"어머니의 자질있는가? 파문!"
"불 끄고 글쓰라고 강요한 지독한 모정, 계모 의혹 자격박탈해야..."
이순신장군편
"가벼이 움직이지 말자.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거이 행동하라."
다음날 조중동은...
"수군 지휘부 요즘 왜 이러나"
"이순신, 수군의 복지부동을 조장하는 발언, 또 구설수에 올라"
지휘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석가모니편
"천상천하 유아독존"
다음날 조중동은...
"석가 발언 파문 일파만파..."
"석가 고립, 독선의 결과"
"오만과 독선의 극치, 국민이 끝장내야"
예수편
"너희들 중 죄없는 자가 저 여인에게 돌 던져라."
다음날 조중동은...
예수 "죄없는자... 발언 일파만파"
"예수, 매춘부 옹호발언 파장"
"잔인한 예수, 연약한 여인에게 돌 던져라 사주"
전두환편
"나는 전재산이 29만원이야."
다음날 조중동은...
노 정권, "국가원로 홀대 극치"
"코드인사 보훈처장 경질해야"
국가원로의 권위와 훈계권을 강화해야...
셰익스피어편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다음날 조중동은...
셰익스피어 의도된 발언 파문 확산
"자살 부추기는 셰익스피어"
작가 자격 의심 전국에 자살동호회 급증
이순신편
"내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다음날 조중동은...
거짓말 지시 도덕성 논란 일파만파
"이순신, 부하에게 거짓말 지시"
이순신의 거짓말, 특검을 통하여 그 진실을 밝혀야 한다
석가모니편
"구도의 길 떠나..."
다음날 조중동은...
"석가. 민중의 고통 외면..."
"제 혼자만 살 길 찾아나서"
"오만과 독선의 극치, 국민이 끝장내야"
예수편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다음날 조중동은...
예수 발언 일파만파 파문 확산... 교계 반발
"예수, 국민들에게 새끼 막말 파문"
예수 '말 폭탄' 왜 반복되나... 증오의 '막말 정치' 당장 걷어내라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
⇒ 조중동 : “소크라테스 악법 옹호 파장~”
시이저 “주사위는 던져졌다”
⇒ 조중동 : "시이저, 평소 주사위 도박광으로 밝혀져"
김구 “나의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통일입니다”
⇒ 조중동 : “김구, 통일에 눈이 멀어 민생과 경제 내팽개쳐”
세네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조중동 : “세네카, 편파 발언, 예술계로부터 로비 의혹”
소크라테스 “너 자신을 알라”
⇒ 조중동 : “소크라테스, 국민을 바보 취급하며 반말 파문”
맥아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조중동 : “맥아더, 죽은 노병들 천지인데 버젓이 거짓말”
클라크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 조중동 : “클라크, 소년들에게만 야망가지라고, 심각한 성차별 발언”
⇒ 조중동 : “클라크, 소년들에게 대놓고 쿠데타 사주”
최영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 조중동 : "최영, 돌을 황금으로 속여 팔아 거액 챙겨"
대통령은 댓글을 달면 안되나?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여기다. 이제 더 이상 네티즌의 참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즉 네티즌의 참여를 막지 못하는 이상, 이들의 발언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언론은 여전히 네티즌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아무리 왜곡된 언론의 보도를 질타하고 꼬집어도 요지부동이다. 이는 소비자의 불만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기성언론이 언제까지 뉴스의 소비자를 넘어서서 생산자 지위를 압박하고 있는 네티즌들의 불만을 외면할 것인지는 그들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에 더 이상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네티즌들이 뉴스에 대한 감정이나 소감을 표시하고 있는 댓글을 무시하는 태도다. 이같은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사례가 있다. 바로 대통령의 댓글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5년2월22일부터 국정브리핑에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직접 댓글을 달았다는 사실이 가볍게 보였는지 비판의 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인 서울대 박효종 교수는 2005년11월23일자에서 ‘그들끼리만 웃는 댓글정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노대통령의 댓글을 비판하고 나섰다.
같은해 11월 18일과 19일에는 언론보도에 대해 반박글을 올린 공무원을 격려하는 댓글 3개, 그리고 20일에는 대통령 자신을 칭찬하는 글에 단 댓글 등 총 4개의 댓글을 “집중적‘으로 달았기 때문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사실 이 칼럼은 ‘댓글’에 대한 본심을 숨기고 있어서 본격적인 평가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대통령의 댓글이 불편하다는 점이다.
본격적인 불편함은 언론사 정치부장의 칼럼을 통해서 나왔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602191748191&code=990507
지금은 한나라당의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캠프에 몸을 실은 경향신문의 김해진 정치부장이 주인공이다. 김씨는 ‘청와대 댓글문화의 명과 암’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속내를 털어놓는다.
업무의 기안과 결재가 온라인으로 이루어지는 청와대 분위기상 댓글은 자연스럽겠지만 정책결정이 가볍게 여겨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대통령이 특허까지 받아놓은 e-지원 시스템으로 업무의 속도와 효율성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국민들로부터 국정운영이 형편없다는 소리를 듣느냐고 호통을 친다. 그리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나온다.
“청와대가 온라인과 가까이 있는 바람에 현장의 국민과 너무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굉장히 단순하다. 온라인은 현장이 아니라는 것, 이는 곧 네티즌과 국민을 별개로 인식하는 산물 자체이다. 거의 모든 국민이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접하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는지 안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주류 기득권층은 네티즌과 국민을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의 산물이 바로 네티즌 깔보기다. 네티즌을 여전히 코흘리개들이 마구잡이 댓글을 다는 존재 정도로 인식하고 있으며, ‘철없는 네티즌’ 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들의 정서를 대변해 준 것에 불과하다. 여기엔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티즌들의 참여는 폭발적이다. 이들의 참여는 누가 제지한다고하여 제지할 수도 없는 수준으로 가고 있다. 그리고 네티즌들의 진실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기성언론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네티즌들은 일방적으로 뉴스를 소비하는 소비자 위치로 돌아갈 것 같지가 않다.
확대-축소, 언론 니들 마음대로 하지 마라
우리나라 언론보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터무니없는 확대 및 축소보도다. 세상에서 벌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기 보다는 기자 혹은 언론의 의도를 개입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과거에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언론이 어떻게 기사를 쓰든, 제목을 달든 그냥 수용해야만 했다.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언론은 궤도를 수정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우리나라가 배출한 글로벌 스타인 가수 ‘비’와 관련된 뉴스가 그 대상에 올랐다.
(출처 : http://blog.hani.co.kr/nopd/5229 )
거의 모든 포털에 주요뉴스로 오른 가수 ‘비’와 관련된 뉴스다. 당시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0명’을 선정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가수 비가 1위를 했다는 것이며 이 결과가 앞으로는 반영될 수 있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타임지 설문결과 비가 1위로 나오자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던 상황에서 나온 기사였다. 그러자 네티즌이 나섰다.
'Plutostar00'라는 네티즌은 기사 원문에는 어떻게 실렸는지 직접 해석을 해가면서 따졌다. 기사 원문에서는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진 설문결과에 대해 신뢰를 주기 힘들다는 논조였다. 그리고 문제가 된 “앞으로는 결과를 반영할 수도”라는 부분 역시 온라인 투표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임을 구독하는 독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는 것을 의미함을 밝혀놓았다.
우리나라 언론의 고질적인 병폐인 거두절미식 보도 혹은 자의적인 외신번역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미 이 책의 앞부분에서도 언론 마음대로의 외신번역 사례가 있었지만 국내 뉴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반비례로 네티즌들의 왕성한 반박글의 양도 셀 수 없이 많아지고 있다.
언론의 말 바꾸기, 체면도 좀 생각하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의 개헌 제안과 관련해 언론의 말 바꾸기 사례를 거론했지만 실상 언론의 말 바꾸기는 한 두개가 아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전시작전권 환수다. 그냥 가만히 있을 네티즌도 아니다.
2006년 8월9일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이 갖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러자 야당인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전직 군수뇌부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함께 일어난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자 네티즌 ‘nicejisung'은 1994년 12월1일자 조선일보 사설을 들이밀었다.
조선일보가 전시작전권을 환수해야 한다는 사설을 쓴 시기는 북한 영변 핵 문제로 전쟁위기가 고조되던 무렵이다. 청와대도 같은 내용의 반박글을 청와대브리핑에 올리기는 했지만, 네티즌의 대응은 더 빨랐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고, 보유하고 있는 자료를 토대로 재빨리 반박글을 올리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시절, 김 전대통령이 전시작전권을 환수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칭송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노대통령의 전시작전권 환수에 반대성명을 발표했던 전직 군수뇌부들이 94년 당시에는 정반대의 입장을 보였다는 것도 동시에 드러난다.
행정수도이전 반대했던 언론들, 옛날엔?
헌법재판소의 이상한 결정으로 변형되기는 했지만 행정수도이전은 오래된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 보수언론을 반대의견으로 여론을 조성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미 계획을 수립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한 조중동 등 보수언론 역시 당연히 행정수도이전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음은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이들은 시침을 뚝 뗀다. 전혀 행정수도이전에 찬성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물어뜯는 데 혈안이 된 보도로 일관했다. 단지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다.
가만히 있을 네티즌들이 아니다. 과거에 언론들이 어떻게 보도했는지 하나 하나 자료를 모아온다. 그 대상은 한나라당도 포함되었다. 그렇게 자료를 모으면 방대한 양이 축적되고, 언론의 말 바꾸기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된다.
물론 청와대와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도 언론이 어떻게 말을 바꾸었는지 공개했지만 역시 그 속도는 네티즌들이 더 빠르다. 어찌됐든 행정수도 이전 논란은 헌법재판소의 ‘관습헌법론’에 의해 좌절되고 청와대 등 몇 개의 관청을 제외한 행정부 이전으로 결론이 났다.
‘관습헌법’, 패러디의 대상으로 전락하다
2004년 10월21일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상 서울이 수도이기 때문에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수도이전특별법’은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러자 인터넷상에서는 관습헌법을 비꼬는 패러디가 출몰했다.
조선시대의 경국대전이 관습헌법의 근거로 차용되자 경국대전에 따라 현 시대를 다시 단죄한 패러디는 한편의 코메디를 방불케한다. 조선시대 관습상 결혼연령은 남자 15세, 여자 14세였기 때문에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인기연예인 이병헌과 이영애에게 곤장 100대로 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습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조선시대의 국왕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노대통령을 능멸하는 조선일보 등은 3족을 멸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정보의 유통 속도와 범위가 점점 빨라지고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각 개인이 갖고 있는 정보가 다수에게 유통되지 않으면 개인의 정보영역에 머물지만, 인터넷을 통해 빠른 속도로 공유되고, 이것이 집단지식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른다 ‘집단지성’으로 불리는 이런 양태의 정보공유는 자신들이 했던 발언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바꾸는 언론이 설 자리를 계속 빼앗고 있다. 대충 거짓말을 하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고, 그리고 실제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불가능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2007년을 뜨겁게 달구었던 유명 연예인과 교수들의 학력위조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네티즌들 역시 더 이상 언론이 던져주는 정보를 받아먹는 객체가 아니라 당당한 주체가 되었다는 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황당한 태클? 황당한 기사
2006년 5월19일 동아일보에 축구팬은 물론이고 온 국민들을 화나게 하는 기사가 떴다. 월드컵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을 격려는 못해줄 망정 장차관들이 선수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장차관들이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황당한 태클을 걸고 있다는 게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이다.
이 기사를 읽은 독자들이 해당 부처의 장차관을 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당시 최고의 관심사가 독일월드컵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거의 죽음을 각오해야 할 일이었다.
더구나 월드컵 준비에 여념이 없는 축구협회를 괴롭히는 기관이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관광부와 국정홍보처,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축구협회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동아일보에서 문제삼은 내용을 보자.
먼저 문화관광부의 경우 장차관이 독일 현지에 선수들을 격려하러 간다는 게 문제되었다. 국정홍보처는 우리 선수들이 머무는 독일 쾰른의 대표팀 숙소에 홍보부스를 설치하자고 협조를 요청했다고 한다. 국정원과 주독일 한국대사관도 얻어맞았다. 대표팀에 태클을 건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기사 말미에 ‘원로축구인’이라는 익명의 축구인을 내세워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과거 독재정권 때는 스포츠를 좋아하는 지도자가 스포츠에 투자를 많이 하면서 이용하는 측면이 있었는데, 현 정부는 스포츠에 전혀 관심도 없고 투자도 하지 않다가 국민이 열광하는 행사만 다가오면 뭔가 한 건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당시 국민들의 월드컵 열기를 생각하면 아마도 대통령이 물러나야 할 정도가 아니었을까? 거의 역적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상은 어떨까? 아니 실상을 떠나 기사를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었다. 소위 ‘팩트’가 맞는지? 아닌지? 말이다. 또다시 네티즌이 나섰다.
(원문 : 위와 동일)
‘agny'라는 네티즌은 확인된 팩트만을 기준으로 상식적인 선에서 판단을 하고 있다. 설령 요청이 있었다면 축구협회에서 거절하면 그만이라는 게 핵심이다. 과거 독재정권처럼 거절하지 못할 이유도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장차관들의 홍보를 위해 방해를 하고 있다는 기사의 내용 어디에도 실제로 장차관 홍보용이라는 팩트는 등장하지 않음을 지적했다. 실제로 기사를 꼼꼼히 읽으면 기자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해석이 팩트로 둔갑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자 또 다른 네티즌은 ‘한나라당 정권이라면 이렇게 기사가 바뀐다’는 제목의 패러디 기사를 올렸다.
(원문 : 위와 동일)
비록 패러디 기사지만 여느 기자들 못지않게 깔끔한 실력으로 기사의 형식을 갖춰 쓴 글이다. ‘nicejisung'이라는 네티즌이 쓴 패러디 기사 원문을 자세히 소개한다.
[월드컵 D-21]정부 각 부처 대표팀 격려 봇물… 선수단 행복한 비명
[동아일보 2006-05-19 04:17]
‘장관과 차관이 월드컵 축구대회 기간 중 독일 현지로 격려차 가는데 대표팀 선수들을 만날 수 있게 해 달라.’ 대한축구협회는 최근 문화관광부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고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월드컵 열기가 고조되면서 각종 사회단체를 비롯해 정부 부처들까지 경쟁적으로 대표팀 지원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번 2006 독일 월드컵은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리는데 가장 좋은 홍보의 장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로 인해 정부내 각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나서면서 축구협회의 움직임도 같이 바빠지고 있다.
문화부는 물론 국정홍보처, 국가정보원 등이 월드컵을 앞두고 국가이미지 제고를 위한 여러 방안을 놓고 축구협회에 각종 문의와 협조 공문을 쏟아내고 있는 것.
문화부는 특히 언제 어디로 가야 외국 기자단을 만나는지와 현지에 참석한 외국 취재진의 현황을 보내달라고 축구협회에 요청해 가장 먼저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문화부의 한 관계자는 18일 “외국 취재단의 명단을 요청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 선수단에게는 최대한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한국 홍보 행사를 가질 예정”이라고 말했다.
국정홍보처는 독일 쾰른의 대표팀 숙소 인근에 한국을 알리기 위한 홍보 부스를 설치하자는 제안을 축구협회에 했다. 대표팀 숙소 주위에 외국의 많은 취재진과 현지 주민들, 여행객들이 몰리기 때문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좋은 홍보수단이라는 것이다.
국정홍보처의 한 관계자는 특히 “홍보 부스를 설치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의 절반은 축구협회가 내겠다고 약속했다"며 축협과 정부가 유기적인 움직임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축구협회 관계자들은 “국가 이미지 제고를 위해 하는 일인데 당연히 협회도 나서야 하는 것 아니냐”며 흔쾌히 응할 것임을 밝혔다. 한 축협 관계자는 또 “어디에 홍보 부스를 설치해야 외국의 취재진들이 많이 오겠느냐”고 기자에게 되묻기도 했다.
국가홍보처의 한 관계자 역시 “홍보처 차원에서 축구협회에 협조 요청을 했는며, 축구협회 역시 적극적인 협조 의사를 밝혔다"며 웃었다.
월드컵을 놓고 벌이는 정부 부처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한 원로 체육인은 “과거 독재정권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정통성이 부족한 군사정권이 정권유지를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스포츠를 이용했다면, 현 정부에서는 그런 부정적인 모습은 나타나지 않아 다행인 것 같다" 고 말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굳이 패러디 기사 전문을 실은 이유가 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이 정도 기사는 아주 잘 쓴 기사에 속한다. 형식도 아주 깔끔하고 내용을 처리하는 기술 역시 프로 기자들 못지 않다.
이 기사를 통해서 과연 한국 기자들이 무엇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것인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미래가 아주 밝다는 상반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있다.
프로 기자들 못지 않는 기사작성 실력에, 탁월한 정보의 가공능력, 핵심을 꿰뚫어보는 안목까지 갖춘 네티즌들이 인터넷이라는 드넓은 정보의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고 다니는 모습은 참으로 통쾌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기성언론과 그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내다볼 수밖에 없는 불편한 현상일 수밖에 없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학자들은 ‘블로거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블로거가 지배하는 세상은 오는가?
최고의 경영서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 경제학’은 블로거가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크리스 앤더슨이 말하는 롱테일(Long Tail)은 간단히 말해서 그동안 시장에서 무시당했던 틈새시장이 시장의 중심으로 부상한다는 것이다. 즉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뜻한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롱테일’의 의미를 보자.
1년에 단 몇 권밖에 팔리지 않는 ‘흥행성 없는 책’들의 판매량을 모두 합하면, 놀랍게도 ‘잘 팔리는 책’의 매상을 추월한다는 온라인 판매의 특성을 이르는 개념. 20%의 핵심 고객으로부터 80%의 매출이 나온다는 유명한 파레토 법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역(逆) 파레토 법칙’이라고도 한다. 무한대의 진열이 가능한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일 년에 몇 권 안 팔리는 80%의 소외받던 책들의 매출 합계가 20%의 베스트셀러들의 매출을 능가하는 의외의 결과를 두고 인터넷이 가져다준 유통 혁명과 관련지어 미국의 인터넷 비즈니스 잡지 와이어드의 크리스 앤더슨 편집장이 만든 개념이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롱테일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크리스 앤더슨은 롱테일 효과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미디어라고 지적한다.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 경제학’ 리뷰 글을 쓴 ‘북데일리’의 김민영 기자가 전하는 책의 내용 일부분은 다음과 같다.
롱테일 효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신문 즉 미디어와 일종의 ‘전쟁’을 선포한 블로거들의 영역확대라 할 수 있다. 2006년 현재 신문사의 매출은(미국기준) 1980년대 전성기 때와 비교했을 때 3분의1 이상이 떨어졌다. 노트북을 이용해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언론 권력을 쥐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름은 ‘블로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블로그를 만들면서 전문적인 저널리즘과 아마추어의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블로거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만큼이나 정통해 있고 관련 기사를 매우 바르게 작성할 수 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저널리트들보다 정보를 더 잘 입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출처 : http://www.bookdaily.co.kr/view/article_view.asp?scode=FEC&article_id=200612060009)
크리스 앤더슨이 이렇게 말했다고 하여 그게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곧장 평가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크리스 앤더슨의 설명이 적어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앞서 미디어 다음의 아고라와 블로거기자단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지만 미디어를 독과점하고 있는 기성언론의 매출과 이에 도전장을 던진 포탈사이트, 그리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기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해가고 있는 블로거들, 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데 참고가 될만한 이론임에는 여지가 없다는 얘기다.
또 하나 아이러니한 것은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 경제학을 하나의 유행어처럼 여기저기 소개하고 있는 기성언론들이 정작 자신들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듯이 경영학 이론으로만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서두에서 밝혀놓았듯이 기성언론들이 인터넷을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와 수단’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네티즌들을 여전히 대상과 객체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적어도 현재까지만 본다면 기성언론의 ‘대안언론’으로서의 ‘블로거뉴스’를 제대로 못보고 있거나, 아니면 억지로 외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크리스 앤더슨은 말한다. “신문사는 낡은 타자기와도 같은 저널리스트 1명을 고용하기보다는 특별한 지식을 가진 블로그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고용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우리나라 기성언론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종이언론은 물론이고, 인터넷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고 하여 대안언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인터넷언론도 포함하여 말이다.
진정한 시민기자, 블로거 기자단의 활약상
이쯤해서 본격적으로 미디어다음의 블로거 기자단의 활약을 소개하는 게 좋겠다. 이들의 활약을 살펴보면 크리스 앤더슨이 롱테일 경제학에서 말한 것처럼 블로거가 지배하는 세상이 올 것인지, 아닌지 대강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9월2일 현재 미디어다음의 블로거기자단에 가입한 네티즌은 3만5414명이다. 아마 기자 숫자로는 세계 최대가 아닐까 싶다. 시민기자제를 최초로 도입했던 오마이뉴스도 있지만 뉴스의 중심이 기자들에게 있기 때문에 지금 말하고자 하는 블로거기자와는 차이가 있다.
하여간 블로거기자단에 가입한 3만5천여명의 기자단은 구체적으로 어떤 활약을 펼쳤을까? 이들의 활약을 살펴보자.
기자들 못지않는 현장취재
2007년 9월2일 오후 6시37분 현재 블로거뉴스의 메인화면이다. 탈레반에 납치됐다 귀국한 피랍자들의 귀국소식을 전하고 있다. 텍스트로 된 기사 뿐만 아니라 동영상 뉴스도 있다. 이 정도면 왠만한 언론보다 생생한 뉴스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그 밑에 관련된 기사들이다. 기성언론은 저 정도의 기사를 생산할 수가 없다. 기자 1명이 관련기사 3~4개는 써야 가능하다. 그러나 취재가 가능이나 할까?
블로거기자단이 생산한 뉴스를 보면 앞서 언급한 ‘집단지성’을 연상할 수 있다. 기사를 쓴 기자단 개개인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누가 기사의 방향을 알려주어 취재지시를 내린 것도 아니다. 각자의 시각과 관심사를 주제로 기사를 썼을 뿐이다. 그 각각의 기사가 서로의 기사가 살피지 못한 지점까지 보완해주고 있다.
동시에 이들은 생산자이자 소비자이다. 뉴스를 생산할 때 소비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면 서로의 시각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오히려 일방적인 시각을 수용해야 하는 불편이 사라지고, 다양한 시각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한다. 기성언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다.
앞서 이 책에서 기성언론의 왜곡보도를 바로잡아 온 네티즌들의 ‘전쟁’을 소개했지만, 그 본질에는 소비자의 시각을 배제한 생산자의 횡포와 일방적인 시각의 주입을 강요받는 불편함이 있었다. 미디어다음의 블로거뉴스는 그 불편함을 제거할 수 있다. 구조적으로 다양한 시각의 기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블로거뉴스 화면을 보자.
역시 9월2일 화면이다. 동영상 베스트 목록을 보면 다양한 소재의 동영상이 소개되고 있다. 그 가운데는 방송사에 제보화면으로 보낼만한 소재도 있다. 실제로 과거 같았으면 방송사에 제보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제보를 하지 않는다. 물론 금전적인 댓가가 클 경우엔 제보를 할 것이다. 그러나 금전적인 보상을 생각하지 않는 네티즌이라면?
롱테일 경제학의 저자 크리스 앤더슨이 설명해놓고 있다. 크리스 앤더슨은 시민기자제를 도입한 오연호 대표의 입을 빌려 이렇게 설명한다.
“시민기자들은 돈을 벌려는 게 아니라 세계를 바꾸기 위해 기사를 쓰고 있다”
뒤에서 다시 얘기하겠지만 자발적인 기사의 생산과 소비는 ‘돈’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오히려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바로 ‘기성언론과 네티즌’ 간의 전쟁이다.
본질적으로는 기성언론의 미디어 독과점 횡포에 맞선 소비자들의 반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자발적인 시민기자, 블로거기자단, 그리고 각종 뉴스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댓글족들, 반박자료를 찾아 인터넷을 뒤지고 다니는 수많은 네티즌들은 기성언론이 일방적으로 주입했던 인식과 시각의 전면적인 해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언론들, 개똥폼 그만 좀 잡아라
이제 좀 더 본격적인 얘기를 해보자. 우리나라 기성언론들, 개똥폼 너무 많이 잡는다. 심하게 말해서 발행부수도 얼마 안되는 신문사 기자들도 어깨에 힘만 주고 다닌다. 실제 거들먹거린다는 뜻이 아니라 기사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전문가들과 수많은 생활인이 존재한다. 기자들 역시 그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기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엄청난 지식을 보유한 지성인인냥 착각하고 있다. 그 결과 네티즌이라는 존재를 우~ 몰려다니는 존재쯤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곧잘 큰 논쟁이 생기면 ‘애국주의’, ‘집단주의’, ‘광기’, ‘포퓰리즘’ 등의 단어를 동원해 ‘무식한’ 사람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몰려다니며 행패나 부리는 식으로 인식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을 당시 촛불시위, 효순이와 미선이의 장갑차 사고로 인한 사망 당시의 촛불시위, 월드컵 응원의 뜨거운 열기,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를 둘러싼 평론가 집단과 대중들의 충돌,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를 둘러싼 논란 등이 모두 해당된다. 지금 이들 사안에 있어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말할려는 게 아니다. 언론의 접근태도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들 사안에 있어서 우리나라 언론이 대중들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말 그대로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미개한 인간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용기를 내는, 그런 집단주의적 광기 정도로 치부하기 일쑤였다. 과연 그런가? 여기서 이걸 따지고 싶지는 않다.
앞서 발행부수를 말했지만, 미디어다음의 블로거뉴스 가운데 우수한 기사들은 최소 1만명에서 최대 30만명의 사람들이 기사를 소비한다. 과연 우리나라 기성언론 가운데 이만한 숫자의 독자를 거느린 언론이 얼마나 될까? 또한 이 정도 숫자의 독자가 읽는 기사가 얼마나 될까?
괜히 개똥폼 잡지 말라는 얘기다. 발행부수도, 그렇다고 기사의 품질도 시원찮아서 일반 네티즌들에게 밀리는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일상의 부조리와 따스함을 담담하게 전하는 네티즌
네티즌들의 기사는 호들갑스럽지 않다. 시각이 담담하다. 침소봉대가 거의 없다. 반면 우리나라 언론은 어떤가? 앞서의 여러 사례에서 이미 드러났지만, 특정인의 발언 일부를 뚝 떼어내서 침소봉대를 일삼는다. 그런 기사에서는 더 이상의 진실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담담하다. 부조리를 고발할 때도, 따스함을 전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왕 심형래 감독의 영화 ‘디워’를 언급했으니 이를 사례로 들겠다. 일부언론은 외국의 평론가 발언을 인용해 이런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해외평론가 ‘디워’ 혹평 ”최근 10년간 환타지 중 최악“]
(원문 : http://news.media.daum.net/entertain/movie/200708/24/newsen/v17896842.html)
그러자 이번에도 네티즌들이 나섰다. 디워를 감싸자는 게 아니다. ‘최악’, 그것도 ‘최근 10년간’에서 ‘최악’이라는 평가를 내렸다면 수백만명의 관객들은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기사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 해당 기사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외국의 영화평론가 클린트 모리스는 호주의 영화전문사이트 무비홀에 “‘디 워’는 10년 동안의 판타지 중 가장 최악”이라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또 클린트 모리스는 “‘디 워’의 전투신은 ‘반지의 제왕’-‘스타워즈 에피소드’와 비슷하고 전체적인 구성은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생각하게 한다”고 비꼬았다.
그런데 네티즌들은 이 기사가 사실을 왜곡하고 있음을 댓글로 지적했다. 클린트 모리스라는 영화평론가는 검증된 영화평론가인지, 과연 ‘최악’이라는 수식어를 용감하게 쓸 수 있는 정도인지는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네티즌들은 일반 개인의 영화평에 불과한 의견을 마치 ‘해외의 전문가’가 평가를 한 것처럼 확대했다는 문제점을 제기했다. 더구나 기사는 최초에 ‘미국의 영화전문사이트’라고 소개했다가 네티즌들이 ‘호주’라고 지적하자 이를 수정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언론의 선정적인 기사 제목은 거의 공해수준에 이르렀다. 과거 스포츠신문이 태동하던 시기를 회상하면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질만 하다.
“아무개가 벗었다”
이런 식으로 기사제목을 썼지만, 막상 기사를 읽어보면 영화 속에서 누드신이 나오거나 하는 식이다. 이런 식의 기사제목을 통한 유인책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를 네티즌들은 ‘낚시’라고 일컫는다. 독자들의 호기심을 잔뜩 자극해서 신문을 구독하게 하는 수법이, 이제 인터넷상에서는 제목을 통해 클릭을 유도하는 식이다.
그러나 네티즌 기자들은 그런 식의 제목을 뽑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제목을 붙이면 기피대상으로 지목된다.
아래는 미디어다음의 블로거뉴스에서 베스트로 뽑힌 기사들의 제목이다.
(원문 : http://bloggernews.media.daum.net/general/best?page_size=&group_count=&page_no=1 )
제목을 보면 담담함을 잘 알 수 있다. 부정적인 기사를 작성할 때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폭발적인 인기나 구독을 이끌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최악’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이는 언론의 생명이 오래갈까? 담담한 제목의 기사가 오래갈까? 이건 소비자들이 선택할 문제이긴 하지만 답은 명확하다.
선정적인 기사 제목을 통한 신문 판매에 열을 올리다가 ‘신뢰의 붕괴’라는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한 한국 언론을 보면 대답은 이미 나와있다.
이제 블로거기자단이 생산한 주요 뉴스를 소개할까 한다.
책상에서 쓴 기사, 생활인에게 한 방 먹다
연말정산 시기가 다가오면 이런 저런 서류 챙기느라 바쁜게 우리네 삶이다. 그래서 언론은 소위 ‘시즈널 seasonal'한 기사, 즉 계절적인 기사를 곧잘 쓴다. 그래서 여러 언론들이 ’연말정산 앞두고 현금영수증 발행 급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원문 : http://tab.search.daum.net/dsa/search?w=news&q=연말정산%20현금영수증%20급증 )
이 기사는 모 업체에서 제공한 보도자료를 토대로 한 기사다. 그러나 대부분 보도자료를 그냥 베껴쓰기에 바빴지 그 이면을 들여다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 이면을 블로거뉴스가 파헤쳤다.
연말정산을 앞두고 현금영수증 발행이 올라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세무서의 독촉이었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이다. 알다시피 현금영수증은 카드결제를 하지 않고 현금으로 지불할 경우 발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무서의 독촉으로 현금영수증 발행이 급증했다고 추론할 수 있는 단서를 블로거가 제보한 것이다.
(원문 : http://blog.daum.net/yogacafe/5813456 )
‘금액보다 중요한 것은 건수랍니다-세무서의 독촉전화’라는 제목의 뉴스는 가급적 현금영수증 발행을 늘려달라는 세무서의 독촉전화를 받았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손님들이 대부분 카드를 사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인위적으로 현금영수증을 늘릴 수 있느냐는 하소연이 담겨있다. 세무서 직원이 편법까지 일러줬다고 고발했다.
업체가 건네 준 보도자료만 넙죽 받아쓴 언론기사가 무색해지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언론, 니들은 일회성이지만 우리는 끝까지 추적한다
예전에 SBS 방송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프라하의 연인’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문화재인 덕수궁을 훼손한 사건이 일어났다. 2005년 11월20일 덕수궁 돌담벽에 드라마 촬영팀이 덕지덕지 종이를 붙여놓은 것이다. 무려 800장의 종이를 붙였다가 이를 떼어내는 과정에서 드라이버와 끌을 사용해 돌담이 훼손된 것이다.
물론 이 사건이 문제가 된 것도 네티즌의 고발 때문이었다. 그리고 문제가 되자 SBS는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약속하고 복구비용도 지불하겠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후 블로거 기자가 현장을 방문했다. 그러나 복구는 커녕 덕수궁 돌담길은 훼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 기자는 훼손된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다시 기사로 올렸고, 이 기사는 18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네티즌들이 SBS 게시판에 항의를 한 것은 당연했다.
(원문 :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4550 )
‘몽구’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블로거 기자는 기사를 통해 “덕수궁 관리소에 복구공사가 언제쯤 시작하냐고 물어봤더니 처음에 공사를 했다가 추운날씨에 미뤄져서 아직 언제부터 복구공사를 시작할지는 결정이 안된 상태라고 했다. 이곳을 찾는 시민들은 훼손된 돌담을 보며 하루 빨리 복구 공사가 시작되길 바라고 있다.”며 “문화재와 산림을 훼손하며까지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 현실...다신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본다.”고 기사를 마무리했다.
이 기사는 고발기사다. 그러나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풀어나간다. 우리나라 언론이 똑같은 사실을 보도했다면 어떻게 보도했을까?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걸까? 실제로 이 사건이 처음 알려졌을 때 언론은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문화재는 한국 언론만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 사람 매장하는 건 일도 아닌 한국 언론
같은 맥락에서 대비되는 기사가 있다. 국가대표 펜싱선수인 남현희 선수가 성형수술을 위해 훈련에 불참했고, 이로 인해 펜싱협회가 자격정지 2년의 처분을 내렸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당시 기사는 이렇다.
(원문 : http://www.hani.co.kr/kisa/section-006001000/2006/01/006001000200601062330521.html )
스포츠신문 1면을 장식하면서 떠들썩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문제는 언론의 보도가 ‘성형수술’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것이다. ‘성형수술이 유죄냐? 무죄냐?’의 엉뚱한 논란이 생겨난 것이다. 즉 운동선수가 성형수술을 하면 되는가? 안되는가?라는 코메디같은 논쟁으로 시끌벅쩍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성형수술로 인해 훈련에 차질이 생겼고, 그 기간동안 사실상 훈련소를 무단이탈한 것에 대해 펜싱협회가 기강확립 차원에서 징계를 내렸다는 게 본질적인 문제였다.
이는 전혀 다른 문제다. 언론은 성형 자체를 논란의 중심에 놓았지만, 정작 쟁점은 훈련 무단이탈에 대해 자격정지 2년의 처분이 적당한가였다. 그러나 언론이 온통 ‘성형수술’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하면서 네티즌들의 토론 역시 ‘운동선수의 성형수술이 정당한가, 아닌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서 진행됐다.
‘라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블로거 기자는 언론의 선정주의 질타했다. 여성들의 성형, 그것도 펜싱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딴 여자 선수의 성형수술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에 초점을 맞추어 혼란을 부채질했음을 지적했다.
(원문 : http://blog.daum.net/phosa/6269477 )
이 기사 역시 6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네티즌들의 찬사를 받았다.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차분한 자세가 엉뚱하게 흐르는 논란을 바로잡은 기사로 평가할만하다.
몇 개의 뉴스를 소개했지만 블로거 기자들이 다루는 소재는 경계가 없다. 보편화된 디지털 카메라와 동영상 촬영기기는 기록의 한계도 뛰어넘고 있다. 단순한 텍스트만 존재하지 않는다. 블로거 기자들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되어 갈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기성언론을 뛰어넘는 대안언론의 꿈이 꿈틀대고 있다는 사실이고, 신뢰의 붕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데다가 경영악화라는 두 개의 암초에 가로막힌 기성언론의 대부분은 블로거 기자로 상징되는 대안언론에 의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비단 기성언론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범위를 확대하면 우리나라 지식계의 권위주의가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서두에서 말했듯이 ‘언론’은 단순히 기성언론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지식인들도 네티즌이라 불리우는 일반대중들의 도전에 직면해있으며, 이미 아래로부터 지적 권위를 상실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최근에 벌어진 교수들의 허위 학력 사태는 우리 사회가 가진 허위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임은 익히 알 것이다. 대학졸업장과 간판으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학벌주의라는 ‘괴물’을 퇴치하지 않고,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로만 접근하는 한 이 문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문제는 하루 이틀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블로거 기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해외 선진국들의 이력서와 취업과정을 소개하며 한국의 학벌중심주의를 질타하기도 했다.
다른나라 이력서는 어떻게 생겼을까?
2006년 3월9일 미디어다음의 블로거 뉴스에는 ‘개인정보 전혀 없는 캐나다 이력서’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이 기사는 10만명이 넘는 네티즌이 읽으며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기사다. 학벌을 조장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데 있어서 한국 언론도 결코 타 분야에 뒤처지지 않는다.
어쨌든 캐나다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는 ‘몽레알레즈’라는 닉네임을 가진 블로그 기자는 기사를 통해 현지 총영사관에서 ‘총무보조’를 뽑는데 있어서도 ‘남성’이라는 자격요건을 부여한 사실을 거론하며 캐나다에서는 불법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나라 망신 시킬까봐 캐나다 노동부에 고발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밝혀놓았다.
그렇다면 캐나다는 이력서가 어떻게 생겼을까? ‘몽레알레즈’ 기자가 올린 기사를 토대로 소개해본다.
(원문 : http://blog.daum.net/montreal/1150248 )
‘몽레알레즈’가 소개한 캐나다 이력서에는 우리나라의 표준 이력서와는 천양지차로 다르다. 일단 사진을 붙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단 사진을 통해 외모를 보고 면접의 기회를 주는 기업이 수두룩한 현실에서 말이다.
더 나아가 학력란이 없음은 물론이고 나이, 성별, 국적, 취미, 신체사이즈, 인종, 국적, 가족관계, 우리나라 주민등록번호 정도에 해당하는 SIN 번호 등 개인적인 정보는 일체 적지않는다고 ‘몽레알레즈’는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기사는 아주 긍정적인 면만 들여다봤을까? 그렇지는 않다. 이런 규정이 있다고는 하지만 채용에 있어서 취업희망자의 경력 등 개인적인 정보가 전혀 참고가 안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기자는 이런 사실까지 실례를 들어서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의 한 신문사가 실험을 했는데, 하나는 프랑스 이름으로, 나머지는 생소한 이름으로 이력서를 넣었더니 프랑스 이름으로 제출한 이력서가 더 많은 면접의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자는 지적한다. 개인적인 정보를 기입하는 것을 금지한 것과 이런 개인정보를 우선으로 선발하는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표준 이력서를 보자.
시시콜콜한 개인정보를 모두 적어넣어야 한다. 어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는 자신의 주민등록초본이 공개된 사실을 크게 문제삼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말단 공무원에서부터 일반 기업에 이르기까지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주민등록초본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제출하는 사회다.
함께 취재에 나서는 블러그 기자들
‘몽레알레즈’ 기자의 기사는 반향을 일으켰다. 그 반향은 ‘공동취재’로 발전한다. 전세계의 블로거들이 이력서 문제를 함께 취재하자는 제안이 올라온 것이다. ‘고준성’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블로그 기자가 ‘세계의 이력서, 함께 비교해볼까요?’라는 제안 기사를 올린 것이다.
이 기사로 인해 재미있는 이력서가 올라오기도 했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 이력서였다.
(원문 : http://blog.daum.net/oionda/7472224 )
‘고준성’ 블로그 기자가 번역한 룰라 대통령의 이력서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대학원 : 안다님
* 대학 : 역시 안다님
* 고등학교 : 안다님
* 중학교 : 다니다 때려치웠음
* 초등학교 : 그래, 이건 내가 다녔어
* 포르투갈어 : 아주 잘함
* 컴퓨터능력 : 내가 손가락 하나를 잃었을 때 무지 아팠다
* 취미 : 가끔 가다 한모금씩 들이 마시는 것
물론 기자가 재미있게 번역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력서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정서로 보면 룰라의 이력서는 거의 쓰레기통에 던져질 수도 있다는 걸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저런 이력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물며 대통령이 고졸 출신이라고 멸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화여대를 나왔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역시 고졸 출신인 대통령 부인을 폄하하는 분위기에서 말이다.
탐사취재, 인터넷으로도 가능하다
블로그 기자들의 활약은 탐사취재로 이어진다. 탐사취재라고 하면 몇날 몇일을 수염도 깎지않고 가방을 둘러매고 현장을 돌아다니는 기자를 연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블로그 기자단에서 ‘무브온21’이라는 팀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커서’라는 닉네임을 쓰는 블로그 기자는 우리나라의 야근 현실을 고발하는 탐사취재를 했다. 2007년 4월11일 은행원들의 야근기사를 처음 내보낸 이후 현재까지 총 44개의 야근기사를 출고했다.
발단은 금융노조에서 은행 영업시간을 단축하자고 요구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모든 언론과 네티즌들은 금융노조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이 때 ‘커서’ 기자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나라의 ‘야근문화’에 초점을 맞추어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케이스는 IT업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을 고발하는 기사였다. ‘커서’ 기자는 댓글취재를 제안했다. 야근문제를 사회이슈화를 하기 위해 현장에서 겪고 있는 실태를 취재하기 위한 것이었다.
‘댓글’을 하나의 언론으로 인식해야 가능한 발상이었고, 실제로 인터넷상 취재의 기법으로 실험하고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이 실험은 궁극적으로 성공했다.
(원문 : http://blog.daum.net/moveon21/7041525 )
이 제안이 올라가자 실제로 댓글 제보가 이어졌다. 대부분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지내는 심경을 밝혀놓았다. 현실을 과연 바꿀 수 있겠느냐는 인식의 소산물이다.
댓글로 자신이 겪고 있는 이야기가 올라오자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이메일을 통한 심층취재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이메일을 통해 질문과 답변을 주고 받는 방식이었다.
앞서 참여정부의 취재선진화 지원방안이 언론계의 반발에 부딪친 사례를 소개한 바 있지만, 실상 현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지원방안 가운데 하나가 이메일을 통한 심층취재다.
하여간 댓글을 통한 제보, 그리고 이메일을 이용한 심층취재를 통해 야근에 대한 기사는 계속 이어졌다. 아마도 한국 언론사에 길이 남겨야 할 심층취재의 모델을 제시한 기사가 아닐까 할 정도의 역작이다.
기사를 잠깐 그림으로 살펴보자.
(원문 : http://blog.daum.net/moveon21/7041525 )
미국과 호주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야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시간외수당을 지급하도록 하고, 이를 어길 경우 법률에 의해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시간외수당 때문에 야근을 강제하지 않는게 현실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하루 만에 이루어졌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기성언론사들은 심층취재를 한다고 하면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동을 투입한다. 그러나 ‘커서’ 기자는 인터넷의 댓글과 이메일을 통한 취재를 통해서도 충분히 탐사취재가 가능하다는 모델을 제시하는가 하면, 엄청난 분량의 취재를 통해 제대로 된 심층분석기사를 출고했다.
그리고 이 기사는 갈수록 아젠다의 범위가 확장된다. 일단 노동부에 질의를 보내고 답변을 받았다. 이제 취재의 모든 것을 공개하면서 뉴스의 제보자이자 소비자들과 소통하면서 뉴스를 만들어가는 단계에 이르렀다.
(원문 : http://blog.daum.net/moveon21/7041525 )
1차 답변에 대해서는 노동부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추가 질문을 하고, 무성의한 답변에 대해서도 있는 그대로 뉴스로 전한다. 이어 뉴스는 외국계 기업과 한국 기업의 노동환경을 비교하는 기사를 출고했으며, 우리나라 노동환경에 대한 노동연구원의 보고서도 요약본으로 기사가 출고됐다.
이어 세계의 노동환경에 대한 시리즈 기사가 올라왔다. 먼저 오스트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안튼’이라는 네티즌과 ‘커서’ 기자가 이메일로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오스트리아의 노동현실을 취재했다.
그리고 일본, 독일, 미국 등의 실상이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됐다. 급기야 야근을 이슈로 한 기사를 쓰기 시작한지 두 달만에 ‘IT맨, 내가 사직서를 쓰게된 이유’라는 글은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며 수많은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원문 : http://blog.daum.net/moveon21/7041525 )
이제 야근 문제는 IT업계 종사자와 취업희망자에게 가장 큰 이슈가 되었고, 죽을지도 모를 것 같아서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는 사연에서부터, 아일랜드에 취업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아일랜드걸’이라는 여성의 사연이 올라오며 SBS와 한겨레신문에서 비중있는 기획뉴스로 다루기에 이르렀다.
또한 야근수당 청구운동을 펼치자는 제안이 올라왔고, 급기야 8월25일에는 IT업계 종사자들이 인터넷을 벗어나 오프라인 모임을 개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커서’ 기자는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한국의 IT업계 미래가 걱정된다는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
‘커서’라는 기자의 탐사취재 보도를 자세하게 소개한 이유는 다양하다. 기성언론이 말하는 탐사취재보다 훨씬 심층적인 탐사취재와 보도가 이미 인터넷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고, 더 이상 기성언론 기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다.
기성언론이 말해주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당사자이자 뉴스를 생산하는 기자 본인이 쉬지 않고 몇 달을 취재한다는 이 사실, 참으로 소름끼치는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우리나라 어떤 언론이 이렇게 심층적이고, 이슈를 물고 늘어지는 기자정신으로 취재에 임한 적이 있었나? 이런 기사 앞에서 과연 우리나라 언론계 종사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출입처 시스템에 매몰되어 기자실을 없애고 브리핑룸으로 바꾸는 걸 가지고 ‘언론탄압’이라고 외치는 언론계 종사자들한테 ‘커서’ 기자의 탐사취재와 끈질긴 보도를 보여주고 싶다.
지식인 계층에 대한 거대한 도전의 물결
언론의 신뢰붕괴와 새로운 수단으로 등장으로 인한 블로그 기자들의 등장은 이미 우리나라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동국대 신정아 전 교수의 학력위조 사건은 총체적인 난맥상의 극치를 보여준 사례였다. 한국 언론이 위기에 봉착한 데에는 조선, 중앙, 동아로 상징되는 거대 재벌 및 족벌언론이 있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한겨레신문 등도 기여도가 낮지만은 않다.
그 대표적인 게 바로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취재지원선진화방안일 것이다. 이번 사안에 대해 거의 모든 언론사가 행동통일을 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한 언론사는 48년만에 하나로 뭉쳤다며 감격에 겨워하기도 한다. 47개 언론사는 결의문을 통해서 “질적으로 군사정권 시절 보다 더 나쁜 언론탄압”이라고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언론에 이름 꽤나 올리는 지식인들도 이 대열에 동승하고 있다. 아니면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고 조영래 변호사가 말했듯이 “진실은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기성언론이 가진 정보의 생산과 유통의 독과점이 지금은 당장 취재선진화 지원방안이 언론탄압처럼 비춰질지는 모르겠지만, ‘커서’같은 기자가 인터넷상에서 계속 이어져나올 경우 걷잡을 수 없는 격랑에 휩싸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면을 들여다보자.
네티즌들의 댓글을 보면 한결같이 기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것도 48년만에 한 자리에 뭉쳤다는 다소 감격적인 기사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성언론이 여론을 착각하고 있는 것은 네티즌을 국민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거나, 인식하기 싫어서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이미 앞 부분에서 언급했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디알북을 아십니까?
몇 년전에 디알북이라는 책이 판매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냉정하게 말해서 굉장히 단순하다. 파워포인트를 이용해서 비교표를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이 책은 2만부가 넘게 팔렸다.
이 책은 좌측에 언론의 왜곡보도를, 우측에 사실 혹은 진실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편집되었다. 간단하면서도 기사내용을 축약해서 전달해 네티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기도 했다.
(원문 : 디알북)
디알북에 실린 표를 보면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풍자적으로 제시해놓고 있다. 풍자적이지만 어쩌면 진짜 해결책이기도 하다. 디알북 역시 네티즌의 작품이다. 우리 사회의 쟁점과 논란이 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슈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도표로 정리한 것이다.
디알북은 소개한 이유는 간단하다. 네티즌이 갖고 있는 ‘무기’는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디알북의 경우도 그랬다. 이제는 시간이 흘렀지만 초기에 네티즌들의 반응은 과히 폭발적이었다. 복잡한 이슈들을 한 눈에 정리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최근에 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된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교회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동안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어서인지 다소 비판의 성역이었다는 사실과 대비하면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기도 했다.
한국 교회는 그간 국가보안법 폐지, 사학법 개정 등을 둘러싸고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의 든든한 아군 역할을 했다. 디알북은 이를 통렬하게 꼬집는다.
(원문 : 디알북)
제목을 자세히 보면 ‘한국 기독교 총연합(시력회복)’이다. 다소 이해가 안가는 제목이다. 그런데 도표를 자세히 보다보면 이해가 된다. 통렬한 풍자가 담긴 제목이었다.
“독재시절 잃은 시력 되찾음. 최근부터 마귀 보이기 시작”
그렇다. 한국 교회의 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집권하는 기간동안 집중적으로 마귀가 보였던 것이다. 설교에 온통 마귀를 물리쳐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디알북은 독재시절을 대비시킴으로써 과거 독재정권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고, 독재자들을 찬양했던 한국 교회를 비꼬고 있는 것이다.
한국 지식인들은 안전한가?
지금까지는 주로 한국 언론이 대상이었다. 왜곡보도에 대항하고 있는 네티즌들의 초점이 언론에 모아지다보니 사례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지식인들은 안전한가? 아니다. 지식인들도 안전하지 않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실명비판을 제기한 이후 지식인 비판 역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과거에는 보수적인 지식인들이 주요 대상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왜 지식인들은 네티즌들의 공격을 받는가? 여기서는 학술적인 질문과 답변을 하지 않겠다. 이 책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 이는 학술적인 영역으로 남겨두는 게 좋겠다. 다만 지식인들의 글과 이를 반박하는 네티즌들의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왜?”라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진보학자 최장집의 몰락
다소 단정적인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보학자로 명성을 날리는 고려대 정치학과의 최장집 교수가 몰락했다고 표현해도 그리 과하지는 않은 듯 하다. 학계와 주료 지식인 계층에서는 어떨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티즌으로 표현되는 일반대중에게는 그렇다.
그가 가진 지적 권위는 이미 무너졌다. 한번 살펴보자.
최장집 교수는 2006년 9월28일, 그리고 2007년 5월31일에 연거푸 경향신문과 인터뷰를 가졌고, 그 중간 2007년 1월에는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무현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최교수가 점화한 논쟁은 백낙청 서울대 교수와 김창호 국정홍보처장,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명계남씨 등이 총출동해 토론이 이어졌다. 여기에 네티즌들 역시 논쟁에 뛰어들어 최교수의 인식과 한계에 대해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최교수의 논리를 어떻게 비판했으며, 누구의 주장이 옳으냐가 아니다. 하나의 성역처럼 군림하던 지식계의 거목도 더 이상 성역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인에 대항하는 네티즌의 정서 밑바닥에는 한국 사회의 주류 지식인들의 엘리트의식에 대한 반감, 그리고 지적 권위를 앞세우면서도 현실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에 대한 거부감이다.
최교수는 연이은 인터뷰를 통해 현정부를 ‘보수정권보다 더 과격한 신자유주의 추구’, ‘우리 사회의 수준이 낮아서 예측 가능한 대통령이 나오지 못했다’, ‘노대통령의 경우 레임덕이 아니라 정치적 탄핵을 받았다’, ‘따라서 새로운 정책을 시도하면 안된다’, ‘노대통령의 개헌 제기는 매우 파괴적’ 등등 굉장히 많은 말을 했다. 그리고 공격적이다.
그런데 최교수가 늘어놓은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논리들이 현실정치에 관심을 둔 네티즌들에게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부의 언론정책에 대한 최교수의 반응이다.
최교수 본인이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보수언론의 색깔론 제기로 인해 청와대의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직에서 물러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언론의 횡포를 직접 겪었던 당사자가 언론문제에 대해 굉장히 나이브한 인식을 보여준 것은 다른 사안에 대한 나이브한 인식을 한층 강화시켜주는 작용을 하게 됐다.
2007년 5월30일 있었던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추진하는 취재지원선진화방안에 대해 최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노대통령이 임기말을 맞아 많은 갈등적 이슈를 제기하고 있다. 최근 브리핑룸 통·폐합 조치에 이어 29일 언론이 계속 반발하면 기사송고실도 없애겠다고 협박하는 등 감정대응이 도를 넘고 있다.
“위험한 상황이다. 대통령이 언론을 바라보는 태도는 민주주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다. 이견을 싫어하고 비판을 싫어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이견과 비판은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비판에 적대적으로 대한다. 이번 조치도 그런 태도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 정책이 만들어지게 된 중요 계기가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에서 비롯된 점은 시사적이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정부조직이 그대로 움직여서 정책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권위주의 독재자들이 했던 행태와 같다. 이런 조치가 시민사회 내에서 필요하다는 여론이 생기고 그게 모아져서 이루어졌다면 문제는 다르다. 그러나 다수의 의견과 배치되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가 정책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은 전혀 민주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기자들이 발로 뛰어서 취재하라’고 하는데 도대체 정부란 게 무엇인가. 정부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방적으로 정보 제공할 테니 나머지는 기자들이 알아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 정부의 책임을 방기할 뿐 아니라 위반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당, 언론, 학자, 시민사회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서 대통령과 정부가 이에 반응하고 대화하는 것이 필수이다. 이 과정을 초월하고, 우회해서 결정하는 것을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plebiscitarian democracy)라고 하는데 이는 온전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최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면 하나같이 언론이 주장하는 내용과 판박이다. 내용은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너무나 원론적이고, 현재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진지한 모색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는 주장이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현업 종사자들에게 비판받는 지점에 최교수는 서있다.
인터넷 정치웹진 서프라이즈에 ‘북미수교’라는 닉네임을 쓰는 네티즌은 최교수의 주장에 대해 근본적인 지점을 공격한다. 최교수의 주장도 본질적으로 ‘노무현 탓’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이다.
(원문 : http://www-nozzang.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9&uid=253082 )
무수한 주장들이 최교수의 입에서 나왔지만 그 모든 것이 ‘노무현 탓’으로 귀결되는 본질은 음미할만하다. 왜냐하면 그동안 참여정부 5년간의 굴곡들이 모두 ‘노무현 탓’이라면 차라리 문제해결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논리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북미수교’라는 네티즌이 반박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우리나라에서 거목 대접을 받고 있는 진보학자가 한국의 다양한 의제들을 얘기하면서 ‘노무현 탓’으로 일관해버리면 그 누구라도 석학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자도 언론이다. 그 주장이 사회의 여론이 된다면 당연히 언론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진단하는 내용이 고작 ‘노무현 탓’으로 귀결되고만다면 너무 허탈하지 않는가 말이다. 최장집의 몰락은 여기서 시작됐고, 이미 몰락해버렸다. 네티즌들에 의해서 말이다.
최교수로 인해 다양한 논쟁과 토론이 이어졌지만 ‘노무현 탓’이라는 본질을 거론한 사람들은 없었다. 그러나 네티즌들은 본질을 주목한다. 최장집 교수는 그 본질을 들키고 말았다. 무언가를 기대했던 독자들에게 ‘노무현 탓’으로 일관한 본질이 들켜버렸으니 석학의 위신이 말이 아니다.
네티즌에 의해 바닥드러낸 심상정 의원
국회의원이라고 성역은 아니다. 이번엔 심상정 의원이 대상이 되었다. 우리나라 진보학계의 거목인 최교수가 아주 길게 이런저런 현안에 대해 말을 했지만 ‘노무현 탓’ 한 마디로 정리되어버렸다면, 심의원은 정부 정책에 대한 제대로 된 고찰없이 아무렇게나 말을 했다가 ‘수구진보’라는 비판을 받아야했다.
심의원은 2007년 2월22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참여정부는 복지사칭 정부다’라는 다소 공격적인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은 ‘복지사칭 정부’라는 규정에 걸맞게 공격적인 내용들이다.
(원문 : http://www.minsim.or.kr/sim_05_view.php?idx=3641&page_num=4&num=66&now_block=1& )
내용의 공격성은 문제되지 않는다. 진짜 문제는 내용이다. 심의원의 주장도 네티즌에 의해 무너졌다.
(원문 : http://www.soyoyoo.com/archives/145 )
‘soyoyoo’라는 닉네임의 네티즌은 심의원의 주장이 가진 가장 큰 결함을 지적했다. 바로 참여정부가 마련한 국가장기발전 계획인 ‘비젼2030’에 “재정마련계획이 없다”는 부분이다. 심의원에게는 뼈아픈 지적이지만 ‘비젼2030’은 그 자체가 재정계획이었다. 재정계획인 ‘비젼2030’을 놓고 재정계획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soyoyoo'가 말한대로 ’몰상식‘일 가능성이 크다.
‘soyoyoo'는 더 나아가 재정계획을 운운하는 심의원이 어떤 일을 했는지 꼬집는다. 바로 국민연금법과 관련된 것이다. 민노당과 한나라당이 아무런 재정계획도 없이 통과시킨 국민연금법 수정안이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soyoyoo'의 글을 따라가보자.
(원문 : 위와 동일)
다들 알겠지만 유시민 전 복지부장관의 사퇴배경이 된 국민연금법 개정안과 관련된 내용이다. 당시 정부는 ‘더 내고, 덜 받는’ 내용의 국민연금법 개정안과 기초노령연금법 제정안을 패키지로 국회에 제출했다. 기초노령연금법은 추가로 재정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국민연금법이 개정된다면 그럭저럭 예산에 반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민노당은 ‘더 내고, 덜 받는’ 내용의 국민연금법을 ‘그대로 내고, 덜 받는’ 내용으로 수정하고, 기초노령연금법은 그대로 통과시킨 것이다. ‘soyoyoo'는 앞서 심의원이 ‘재정계획’인 ‘비젼2030’에 대해서는 ‘재정계획이 없다’는 이유로 “참여정부가 복지정부를 사칭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공격했지만 정작 국민연금법과 기초노령연금법 처리에 있어서는 재정계획도 없이 법률을 통과시켰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한겨레신문의 몰락, 네티즌에겐 진영논리가 없다
사실 한겨레신문하면 진보언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 반대편에 조중동이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식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겨레신문에 대해 애착을 갖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진보언론이건, 보수언론이건, 언론에게 중요한 것은 ‘말의 신뢰’이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역시 말의 신뢰를 상실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는 정도로 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성한용 선임기자의 칼럼이 있다. 성기자의 칼럼이 네티즌의 질타를 받는 이유도 간단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역시 결론은 ‘노무현 탓’이기 때문이다.
성기자의 칼럼을 보면 조중동 못지 않게 대한민국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돌고 있음이 분명하다. 모든 잘못된 것은 ‘노무현 탓’으로 돌려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노무현 탓’이라고 한 마디로 잘라 버릴 수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현상을 복잡하게 분석할 필요도 없고, 해법도 너무 간단하기 때문이다. 노대통령이 물러나면 된다. 그런데 대통령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한겨레신문을 위시한 진보언론과 진보학자들은 물론이고,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과 보수정당의 고민은 조만간 해결될터이다.
과연 그런가? 성 기자의 칼럼 하나를 보자.
(원문 : http://www.hani.co.kr/arti/SERIES/64/214009.html )
‘6월이 서글픈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성기자는 노무현 대통령을 찍었던 사람들의 비애감을 토로하고 있다. 대통령을 지지하건, 반대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개인의 판단에 대해 왈가불가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지지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기자는 이 칼럼을 통해 참평포럼 강연에서 노대통령이 ‘세계적 대통령’이라고 표현한 것이 거슬렸다고 한다. 겸손이 미덕이라고 한다. 이것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이니 문제삼을 이유가 없다.
성기자가 하고 싶은 말은 뒷부분에서 나온다. 정권교체에 대한 불안감이다. 그리고 그 책임을 은근히 노대통령한테 돌리고 있다. 정권교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그 책임을 현직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말했다. 근거? 없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세상이 참 편리하다. “모든 길은 노무현으로 통한다”는 격언을 만들어도 될 것 같은 풍경들이다.
그냥 있을 네티즌이 아니다. 한겨레신문 창간 독자였다는 ‘20년주주독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네티즌은 이같은 점을 지적하며 한겨레신문 절독 의사를 표시했다. 만약 이 네티즌이 한겨레신문을 절독한다면 이건 누구 때문일까? 한겨레신문 때문일까? 노무현 대통령 때문일까?
너무 나간 성한용 선임기자
이왕 성한용 선임기자의 칼럼을 소재로 등장시킨 김에 하나 더 소개한다. 2007년 4월25일자 칼럼을 통해 성기자는 ‘전직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이 칼럼에서 성기자는 서두에서 뜬금없이 “대통령 재직 중에는 공소시효의 진행이 당연히 정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헌법재판소 1995.1.20)는 말을 꺼낸다. 이유가 궁금해진다. 칼럼 중간 부분에 희미하나마 그 이유의 일단이 나온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이, 2004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 때 노무현 대통령에게 불리한 수사 결과가 나오자, 대통령 측근들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폐지를 거론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별반 새로운 내용도 아니다. 그런데도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대통령’, ‘대선자금’, ‘검찰’ 등의 단어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민감성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노 대통령 임기 말이다. 그도 머지 않아 ‘전직 대통령’이 된다.
(원문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205034.html )
2004년에 있었던 대선자금 수사와 관련해 노대통령과 관련된 부분은 공소시효가 정지된 상태이고, 대통령 임기는 곧 끝나고 전직 대통령이 된다는 얘기다. 퇴임하면 검찰의 수사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정도에 이르면 거의 협박 수준이다. 소위 ‘사이비 기자’들이 이런저런 꼬투리를 잡아서 돈을 뜯어내는 수법과 아주 닮아있다. 무엇이 문제가 되고, 어떤 사실 때문에 수사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구체적인 사실적시는 없다. 그냥 냄새만 풍긴다. 그리고는 이어진 글을 통해 전직 대통령들이 검찰 수사를 받았던 전례들을 줄줄이 소개를 하고 있다.
그리고는 뜬금없이 노대통령이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의 한나라당 탈당을 비판한 발언과 개헌안을 제기한 것, 한미FTA를 추진하는 것, 언론의 보도에 반박하고 있는 청와대브리핑의 사례를 나열한다. 그리고 “권력은 무상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도대체 성기자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노무현 너도 퇴임하면 검찰 수사를 받게 될지 모르니까 몸조심해라”는 것일까? 죄가 있다면 당연히 검찰수사를 받고 처벌받는 게 맞다. 그러나 이건 냄새만 풍기면서 구체적인 사실은 적시하지도 않았다. 기자의 글쓰기가 이래도 되는걸까?
이쯤되면 성기자의 칼럼을 반박하는 내용도 ‘막나가는’ 글이 나올 수밖에 없을터이다.
(원문 : http://www-nozzang.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9&uid=293422 )
‘평강’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네티즌은 ‘한겨레는 폐간하고 성한용 기자 절필하는 것이 순리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격한 댓글이 달린 것 역시 불문가지다.
두 개의 사례는 누구 편을 들자는 얘기가 아니다. 언론과 기자들의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고민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실을 기반하지 않은, 반협박성의 글을 쓰는 게 언론인의 윤리에 합당한 것인지 진지한 모색이 필요하다. 오늘날 대다수 기성언론 신뢰가 붕괴된 원인을 멀리 찾을 것 없이 가까이서 찾아보자는 얘기다.
(여기까지 쓰고 마무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추가로 작업을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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