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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혀, 또 한 사람의 친미주의자가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Steven Kim 2008. 11. 20. 12:20

내가 어릴 때, 우리집 골방 한 쪽에 큼지막한 드럼 통 하나가 있었습니다.생긴 것은 큰 드럼통인데 재료는 양철이 아니라 종이였습니다. 희미한 기억으로 그 통에는 미국의 성조기 문양과 함께 별이 새겨진 앵커같은게 인쇄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그게 미군표시였을 것 같습니다. 물론 큼지막한 영어 글씨와 함께요. 그게 미국에서 온 분유통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덩치가 커서 우유도 이렇게 큰 통으로 실컷 먹어야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 통을 열어보면 작은 자루들이 여러개 있었고, 그 자루마다에는 콩이며 팥이며 잡곡들을 들어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드럼통을 그렇게 뒤주로 이용했던 것입니다.

내게 몇 푼의 용돈이 생겨서 가게에서 번데기 과자나 소라과자 같은 것을 사와서 먹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 나는 가끔 그 분유통 안으로 기어들어가 두껑을 덮고 어둠속에서 혼자 먹고는 했습니다. 동생이나 형들한테 과자를 뺏기기 싫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그 드럼통은 내게 하나의 자랑이었습니다. 이웃의 내 또래 놈 중 하나가 개떡을 가져와 저 혼자 먹을 때도, 나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온 분유를 먹고 자란 놈이다. 개떡이나 쳐먹는 너같은 놈 하고는 차원이 달라... 뭐 이런 식의 내 오만을 유지하고, 쉽게 상처입을 처지에 놓인 내 자존심을 지키는데 있어서 그 드럼통이 한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분유로 떡을 쪄먹기도 했답니다. 먹은 기억은 없는데 들은 말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분유떡, 옥수수빵, 밀가루빵... 이렇게 발전했던 것으로 나는 알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도 가끔 빵 급식을 받고는 했는데 형들은 분유떡을 급식받기도 했답니다. 내가 다닐 때는 옥수수빵도 거의 사라지고 밀가루로 만든 딱딱한 식빵덩어리를 가끔 나눠줄 때가 있었습니다. 상급반으로 올라갔을 때는 이런게 없어졌는데 저학년일 때는 학교에서 빵을 얻어먹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겨울이면 학교에서 난로를 피웁니다. 아마 조개탄이나 갈탄 난로였던 것 같습니다. 그걸 피우면 노란 연기가 연통을 타고 나와 바람에 실려 멀리 퍼져가고는 했습니다. 내눈에는 그게 참 이쁘게 보였습니다. 요즘 생각해보면 그 빛깔이 연막탄의 노란색과 비슷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난로를 핀다고 교실이 따뜻해질리가 있습니까.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꽁꽁 어는 것이지요. 선생님이나 수업 중에 가끔 난로 연통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언 손을 녹이는 정도였지요. 그래서 저도 자라면 정말 선생질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수업 중에 손녹일 수 있는 선생님이 그렇게 부러웠던 것입니다.

아무튼 어릴 때 내게 있어서는 미국은 내 자존심의 일부였습니다. 겨울이면 강이 얼어붙습니다. 동네애들은 몽땅 강으로 나가 썰매를 타며 어름을 지칩니다. 방학 때는 정말이지 강바닥에 애들 천지입니다. 내가 어릴 때는 정말이지 스케이트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촌놈 말로 '하나빼이'라는 것과 '똥따개이'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하나빼기라는 것은 썰매의 발판이 하나입니다. 타기는 어려워도 속도가 빠른 것입니다. 이걸 타고 장치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똥따개이라는 것은 군용 탄피통의 뚜껑입니다. 나는 하나빼이보다 똥따개이를 더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미국산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속도도 나지 않고, 뒤에 달린 꽁지 때문에 털털거렸습니다. 그리고 이게 쇠붙이다보니 얼음이 달아붙으면 발이 미끄러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걸 타면 웬지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내 뒤에는 미국이라는 큰 빽이 있는 듯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집 밑의 집에는 김상사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현역 육군 상사였던 것 같습니다. 그 집에 내 또래의 여자애가 하나 있었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 여자애한테 결혼하자며 꼬득였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랬다가 얘가 자기 엄마한테 일러받치는 바람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이 벌써 홀랑 까져서 못하는 말이 없다'는 식으로 디지게 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그 여자애한테 결혼하자고 했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 애 손에 들려있는 미제 초클릿과 과자부스러기가 탐이 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애 아빠인 그 김상사가 가끔 도로변에다 군용트럭을 세워놓고, 생선상자나 어묵상자를 집으로 들여놓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여자애와 결혼을 하면 그렇게 그집으로 들어가는 군용 생선과 어묵의 일부가 내것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런 상자를 학꼬라고 불렀습니다. 말하자면 생선학꼬 오뎅학꼬 이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나중 알고보니 그 학꼬라는 말이 상자라는 뜻의 일본어였습니다. 일제 식민시대의 잔재어인 셈이지요. 아무튼 육군 상사가 저 정도인데 내가 자라서 별을 달면 우리집은 온통 군용생선상자와 어묵 박스로 다 채워놓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정말이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우리 집 앞 도로에는 자주 군용 트럭이 다녔습니다. 나는 군용트럭이 지날 때마다 혹시 미군이 타고 있지 않나하고 늘 살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미군이 지나가면 '헬로 양키스'라고 외치면 초콜릿과 사탕을 마구 던져준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이지 아주 가끔 미군이 트륵에 타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럴 때마다 열렬히 '헬로 양키스'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내게 초콜릿이나 사탕을 던져주는 미군은 없었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미군이 내게 초클릿이나 사탕을 던져주고 싶지 않을 만큼 내가 이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음부터는 좀 이쁘보이게 땟국이 좀 흐르긴 했지만 그래도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어며 목소리를 좀 가다듬어서 '헬로 양키스' '하이 유에스 아미'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내게 쵸클릿이나 사탕을 던져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외쳐서 쵸클릿이나 사탕, 심지어 깡통을 얻어먹었다는 주변 형들이나 애들의 얘기는 내가 믿기어려운 신화같은 게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정말이지 한번도 그렇게 소리를 질러서 미군으로 부터 그들이 먹던 쵸클릿과 사탕을 얻어 먹은 적이 없습니다. 정말 실망스러웟지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는 미군이 지나가면 팔뚝을 쑥 내밀거나 발을 들어 앞으로 차듯 쑥 내밀면서 '엿먹어라'로 바꿔게 되었습니다. 가끔보면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트럭에 타고 있던 미군들도 저들끼리 키득거리면서 가운데 손가락을 곧추세워서 내 쪽으로 내밀어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른바 '바큐'입니다. 서로 주고 받는 것이지요...

미군...그리고 미국에 대한 내 환상이 조금씩 그렇게 일그러져가기는 했지만 그래도 미국은 여전히 내게 있어서 '꿈의 나라'이고 '아름다운 신대륙'이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영어 선생님이 미국에 대한 얘기를 하거나 유학 다녀온 일가친척을 얘기할 때면 꿈에라도 한번 미국땅을 밞아보고 싶었습니다. 미국만 가면 졸지에 내가 링컨이 될 것도 같았고, 멋쟁이 존 에프 케네디가 될 것도 같았습니다. 혹시 마릴린 먼로와 손이라도 잡아볼 수 있을 것 같은 몽상에 빠져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미국을 잊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무덤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미국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미국은 천사들의 나라도 아니고, 국제신사들만 사는 나라가 아니란 걸 알게 된 것이지요. 그건 팬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지 같은 도색잡지로 부터 나는 미국을 재발견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미국이 어떻게 천사의 나라이고 신사의 나라일 수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미국 도색잡지을 본 이후로 나는 미국사람만 보면 마음속으로 발가벗겨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점점 추한 미국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나는 발랑 까졌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떻거나 나는 조금은 근엄하고 뭔가 예의가 있는 듯한 그런 한국 가정에서 자란 사람으로 미국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면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랐습니다... 나는 지금 미국에 대해 어떤 환상이나 꿈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오바마가 당선되었을 때 우리 중 몇몇은 아주 감격스러워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오바마를 비교하기도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나는 비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미국일 뿐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이며, 오바마는 오바마이고, 노무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일 따름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의 가정에서 한국식 교육을 받고, 한국식 가치관으로 대통령이 된 분입니다. 모르겠습니다. 노무현대통령이 왜 오바마와 닮은 점이 있는지... 그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저 노무현 대통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이명박 정부는 미국에 무척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전에는 오바마가 미국의 자동차 업계를 직접적으로 지원하겠다면 이것은 WTO와 같은 국제 협약을 위반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게 오바마를 향한 협박인지 경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좀 많이 우습습니다. 한미동맹, 혹은 미국과의 우호협력을 최우선시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인식으로는 상당히 상식밖의 일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오바마가 혹은 미 행정부가 눈이나 하나 깜짝하겠습니까만 이런 말을 하는 자체가 머리속에 온통 미국이라는 나라밖에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은 사실 국제협약을 아주 빈번히 깨뜨려온 나라입니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그랬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 남의 나라를 그렇게 무력으로 침략한 나라는 아마도 미국밖에 없을 것입니다. 국제 질서와 힘의 균형을 유지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미국의 군수산업을 위한 전쟁으로 귀납되고 있습니다.

이런 미국과의 관계를 최우선시하는 이명박 정부의 속내는 뻔한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가 그렇게 안했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는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대등한 외교, 고개 숙이지 않는 합리적이고 당당한 외교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당당히 받겠다는 것이고, 다른 나라와의 형평성에 있어서도 미국이라고 헤해서 특별해서는 안되는 것이며 균등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들어서자 말자 보란듯이 참여정부의 외교정책과 미국과의 관계를 뒤집었습니다. 쏜쌀같이 미국으로 달려가서 조지 부시와 손을 맞잡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습니다. 무슨 피가 섞인 형제지간인 것처럼 혈맹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오바가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이명박 정부의 태도가 조금씩 엇박자를 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바마 행정부가 조지 부시 행정부와 달리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설 조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껏 조지 부시 행정부의 미국만 보다가 오바마가 이끄는 미국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되면서 적응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명박 정부의 대미 인식이 편향된 것이었기에 이를 수습할만한 준비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바마 행정부의 미국에 대해 이제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명박 정부가 그토록 주기도문처럼 외치던 한미동맹 관계는 과거 김영삼 정부처럼 와르르 무너질 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제 우리가 이명박 정부에 한미동맹관계의 강화를 주문하면서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균형있는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주문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친미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나도 어쩌면 친미주의자가 되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원만한 관계, 합리적인 균형있는 관계를 위해 그렇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겟습니다.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내가 친미주의자처럼 말해야 하는 이런 상황...어쩌면 이게 다가올 우리의 현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또 한사람의 친미주의자가 생길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출처 : 고운 (김영은)
글쓴이 : 고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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