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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폭군적 정치보복, 그 업보 어찌하려고... <정연주>

Steven Kim 2009. 10. 15. 06:02

이명박 전 의원이 한국 특파원들, 주미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골프를 치고,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골프를 칠 줄도 몰랐으려니와, 그런 자리에 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명박'이라는 인물을 처음 대면한 것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진행되던 2007년 8월, KBS에서 있었던 TV 토론회에 참석하러 왔을 때였다. 부인과 함께 KBS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맞았는데, 그 때 이명박 후보는 함께 온 부인 김윤옥씨에게 "정 사장, 경주 분이야"라고 소개했다. 잠깐이었다.

 

당시 KBS에서 있었던 한나라당 경선 TV 토론에서는 이명박-박근혜 후보 사이에 불꽃 튀는 설전이 있었다. 서로 예의를 갖춘, 차분한 목소리로 진행된 토론이었으나, 상대방의 도덕성과 약점을 파고드는 공격은 매서웠다. 박근혜 후보는 이명박 후보의 위장전입, 세금 미납 전력, 건강보험 편법 납부, 선거법 위반 전력 등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면서 "대통령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 할 수 있겠느냐"고 몰아세웠다. 그리고 "이 후보의 공약은 다 토목공사인데 이런 시대 뒤떨어진 것으로 어떻게 경제전문가라고 하겠느냐"고 공격했다.

 

이명박 후보는 앞선 TV 토론에서 박근혜 후보가 2002년 2월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한국미래연합 창당 때 이인제 민주당 의원과의 연대설을 부인한 데 대해, 당시 인터뷰 기사를 제시하면서 "지도자가 되려면 거짓말을 하나 안 하나가 중요하다"며 상대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웠다.

 

  
2007년 8월 대선 후보 경선중 대전 합동연설회장에 나란히 앉은 이명박, 박근혜 후보.
ⓒ 오마이뉴스 이종호

작정한 듯 'KBS 편파성' 시비

 

처음으로 좀 긴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2007년 8월 말, 그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되고 난 뒤 KBS를 방문했을 때였다. 한 무리의 한나라당 인사들과 함께 사장실 옆에 있는 귀빈실에서 함께 자리를 했다. 나의 왼쪽에 자리 잡은 그는 미리 작정을 하고 온 듯 KBS의 공정성 문제를 들고 나왔다. 후보 경선 때 자기 아내더러 "정 사장, 경주 사람이야"하던 그 분위기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영진 방침이 잘 돼야 되는 것 아니에요? 야당은 피해의식이 있어요. 2002년 대선, 탄핵 때도 그렇고... 피해를 입은 사람 입장에선 그래요. 정 사장도 유명하잖아요?"

 

당시 한나라당을 출입하던 KBS 박성래 기자가 최근에 펴낸 책에 나오는 이 후보의 발언 내용이다. 박 기자는 귀빈실 옆자리에 앉아 이명박 후보와 나 사이에 오간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다. 그는 이날 분위기가 내내 긴장감으로 흘렀다고 기억했다.

 

이명박 후보가 KBS 편파 문제와 야당의 피해의식을 계속 이야기하면서 경영진 방침을 이야기하기에, 나는 KBS가 많이 바뀌었는데, 밖에서는 잘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이 후보는 "특정 프로그램의 기획이나 성향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박승규 전 KBS 노동조합 위원장
ⓒ 유성호
박승규

KBS 사장으로 온 뒤 참 많이도 들어 온 이야기였다. 한나라당, 조중동 등 우리사회의 수구 기득권 세력뿐 아니라 KBS 내부에서도 나왔던 소리였다. 특히 박승규 당시 노조위원장(현 보도본부 탐사보도팀 '시사기획 쌈' 데스크)은 공개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노사협의회 때도 구체적으로 몇몇 프로그램을 지칭하면서 편파적이라고 몰아세웠다. 박승규 당시 노조위원장의 성향을 잘 드러내 보여주는 인터뷰가 있다. 나에 대한 퇴진 압박이 정점을 향해 치닫던 지난해 6월 26일자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승규 위원장은 그렇게 말했다.

 

- 노조가 20일 발표한 성명을 보니 '사내 일부 친정(친 정연주) 세력'을 다시 한번 강조했던데 그런 세력이 존재한다고 보나.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보기엔 KBS PD협회는 다수가 그렇고, KBS 기자협회는 회장과 집행부, 그리고 젊은 기자들이 그렇다. 개혁적 부분만 강조하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오늘도 보수단체가 와서 빨갱이니 뭐니 얘기하는 것 아닌가."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반응을 여과 없이 드러낸 이 인터뷰를 보면서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다. 개혁에 대한 거부감, 프로그램 편파성 주장, 당시 KBS 노동조합 집행부의 빛깔이었고, 진종철 노조 때부터 지금까지 3대째 KBS 노동조합 집행부의 정체성이다. 그들은 노동조합이라는 깃발만 내걸었을 뿐, '노동'과는 거리가 먼, 기득권 세력이자, 권력집단일 뿐이라는 게 나의 판단이다. 방송의 독립성을 위해 노력해 온 KBS 노조의 전통과도 이미 유리된 집단이다. (진종철, 박승규 노조의 실체는 차차 증언하도록 하겠다).

 

"MB 화끈하지요?" - 재벌사 사장의 독단성과 폭군성

 

"특정 프로그램의 기획이나 성향에 문제가 있다"는 이명박 후보의 말을 가지고 그 자리에서 다투거나 논쟁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그런 자리도 아니었다. 나는 수신료 인상 문제에 대해 잠시 설명을 했고, 이명박 후보는 다시 KBS의 공정성과 구조조정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그렇게 맴돌았다.

 

그를 배웅하고 나자, 당시 KBS 정치팀 야당반장을 하던 이춘호 기자(현 청와대 출입)가 내게 와서 "사장님, MB 화끈하지요?" 그랬다. 나는 그냥 웃었다. '화끈하다'는 말의 진의가 무엇일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실, 나는 그 날 이명박 후보와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형적인 '재벌회사 사장'을 보았던 것이다. KBS에 와서, 광고 때문에 광고주인 대기업 또는 재벌회사 부회장, 사장들과 같이 술을 마신 적이 더러 있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 중 일부의 행태는 대략 비슷했다. 남의 말에 잘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주장을 많이 하고, 거침이 없고, 심한 경우 안하무인이었다. 이춘호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그들은 "화끈했다".

 

재벌 오너인 회장에만 충성을 다 하면 되고, 회장만 빼면 나머지는 죄다 절절 매는 졸병들이 아닌가. 그러니 거침이 없었다. 명령만 하고, 호통만 치면 그게 '강력한 리더십'인 것이다.

 

95년 봄, <한겨레>신문 워싱턴 특파원 때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이자 미국의 대외 정책에 대해 송곳처럼 날카로운 비판을 해온 노암 촘스키 교수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때 인터뷰 진행 도중 그는 불평등이 확대되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20세기 초 세개의 거대한 독재 전제주의적 폭군(tyranny)이 등장했는데, 볼세비즘, 파시즘,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그게 뭔지 아는가?"

 

나는 선뜻 답을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대자본을 배경으로 한 사기업이다. 볼세비즘, 파시즘은 이제 거의 붕괴했다. 그러나 자본의 힘을 가진 기업의 독재는 그 어느 때보다 막강하다. 그 힘은 이제 국가의 힘을 넘어서 있으며, 자본, 세계경제, 세계무역을 장악하고 있다. 기업 독재권력의 확대는 외환에 대한 규제를 없애면서 크게 촉발되었다. 국제외환에 대한 규제가 없어짐으로써 투기성 금융자본은 거대한 폭발을 하게 되었다. 거대 금융자본이 국경도 없이 넘나들면서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촘스키 말이 떠오른 이유는 아마도 그 거침없이 화끈하다는 지적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명박 후보를 처음 직접 대면한 뒤 내 머리를 스쳤던 생각은 광고 때문에 만난 거대기업 부회장, 사장의 무모하다 싶을 정도의 독단과 일방주의, 촘스키가 이야기한 대자본을 배경으로 한 사기업의 '폭군' 이야기였다.

 

참으로 혹독하고 야비한 보복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이명박 정권 출범 뒤 발생한 일련의 사태와 바로 연결되었다. 용산 참사, 미네르바 사건, PD 수첩 사건, 시국 선언한 전교조 교사들의 해직과 사법적 징벌, 촛불 시위자들에 대한 사법적 징벌, 온갖 권력기관들의 정치세력 종속과 정치사찰 부활, 나의 해임을 비롯한 공기업 사장들의 강제 퇴임, 사회적 저항자에 대한 연좌제, 박원순 변호사 사건에서 보듯 시민사회단체에 대한 돈줄 씨 말리기, 진중권 교수의 강의 박탈, 시중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광고주에 대한 직간접적 압박(권력기관에서 "지혜롭게 사시라"고 한다던가?), 진보언론 광고 고사 현상, 이로 인한 여론의 편중 심화와 다양성 소멸, 그리고 이 모든 역사 역류의 가장 상징적이고 집약적 사건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자신 몸의 반쪽이 무너진 후 석달 만에 끝내 온 몸이 무너져 버린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 독단과 일방주의, 폭군적 상황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정권 차원뿐 아니다. 그 아래 종속되어 있는 하부조직의 폭군적 행태는 더 구체적이고 잔인하다. 정권의 하부구조로 전락해버린 듯한 KBS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런 것들이다. 박승규 노조위원장이 이야기한 바 있는 '친정 세력'에 대해 KBS에서는 참으로 혹독한 보복이 가해져 왔다. 미운털이 박혔다고 여겨지는 사원들을 지방으로, 또는 도무지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엉뚱한 부서로 발령을 내는가 하면, '정연주 빛깔'이 있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은 죄다 없애거나, 프로그램 이름을 바꾸면서 프로그램 성격까지 바꿔버렸다.

 

  
방송인 김제동이 9일 저녁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노무현재단 출범기념 콘서트-파워 투 더 피플(Power to the People)'에서 멋진 공연을 선보이고 있다.
ⓒ 유성호
김제동

KBS 내부 사원들에 대한 보복뿐만이 아니다. 출연진에 대한 박해도 상식을 뛰어넘는다. 윤도현씨에 이어 김제동씨도 느닷없이 방송에서 퇴출되었다. 이에 앞서 이미 정관용, 박인규씨 등도 쫓겨났다.

 

김제동씨를 쫓아낸 뒤 KBS에서 나온 반응이 참 유치하고 바보스럽다. 프로그램을 너무 오래해서 퇴출시켰단다. 그것도 프로그램 개편 10일 정도 앞두고, 방송 녹화 3일을 앞두고... 선수들끼리는 다 아는 그런 이야기는 좀 안했으면 좋겠다.

 

프로그램 오래한 것이 퇴출 이유? 본인한테는 좀 미안한 이야기인데, KBS 1TV '아침마당'의 이금희 아나운서는 지금 몇 년째 그 프로그램 하고 있는지. 혹시 지난번 대선 때 이명박 후보 부인의 스피치를 도와준 인연 때문에 이금희 아나운서는 방송 오래 해도 손을 댈 수 없는 건 아닌지.

 

그 업보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렇게까지 잔인한지, 말문이 막힌다.

 

연예인이든, 방송인이든, 그 누구든, 정치적 입장이 있기 마련이고, 그 입장을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권리이다. 그것은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인데, 그 자유와 권리를 행사한다고 보복을 가하는 것은 하나의 사상, 하나의 정치 이념만을 요구하는 전체주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벗들이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라

 

어쨌거나 나는 박해를 받고 있는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물론 그들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로서 공영방송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기에,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으로서 사회적 발언을 한 것이기에, 그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박해가 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의 해임 이후 벌어지고 있는 그 혹독한 보복과 좌절이 어찌 내게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벗들이여.

 

너무 아파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게.

패배와 좌절조차도 진보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낙관을 버리지 마시게.

spero spera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네.

 

김수영 시인의 '풀'을 그대들에게 보내네.

바람 불어 눕지만

바람보다 그 풀은 먼저 일어선다네.

 

김수영/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출처 : 고운 김영은
글쓴이 : 고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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