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노무현, 부활하다
이은선 / 세종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I. 시작하는 말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후 7일장으로 온 국민이 애통하며 보내고 나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 아직도 온전히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가운데 그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특히 권양숙 여사는 어찌 살고 계실까로 자꾸 생각이 달려간다. 이즈음 한겨레신문의 곽병찬 칼럼은 “서은이 잘 보살펴주세요”라는 글로 몇 일전 몸져누워서 입원을 하게 되었다는 권 여사에게 할아버지 꿈과 진실을 전해줄 사람이 할머니이므로 부디 건강하시라는 당부를 보냈다. 그런가? 그 분에게 그럴 힘이 남아있을 것인가?
1990년이 되어서야 저자의 이름을 밝힐 수 있었던 『전태일평전』의 저자 고 조영래 변호사는 그 서문에서 “전태일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 속으로 되돌아가 그 안에 살고 있다”라고 썼다. 후에 장기표 선생은 다시 그 평전을 예수에 대한 4복음서와 바울의 서한집을 합한 신약성서와 흡사한 성서라고 말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고 고백하였다.
이렇게 우리 삶에는 죽음으로써라도 전해주고자 하는 선한 꿈과 진실이 있으며, 그것을 다시 이어주고 계속하고자 죽을 것 같이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주역계사전》은 ‘이어주고 계속하는 일은 선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일은 (우리의) 운명이다(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라고 밝혀주었다. ‘완성해내는 일(成之者)’은 ‘성(性)’이라고 했으므로 가장 먼저는 몸의 피로 연결된 가족이거나, 또는 어머니이거나 손녀 등의 ‘여성’, 그리고 땅의 일인 ‘곤도(坤道)’의 일일 터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작한 하늘의 일인 ‘건도(乾道)’의 크고 용기 있는 일을 그의 사랑하는 손녀딸 서은이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계속해나가서 이루어낼 곤도들의 촛불이 온 세상에 이어지고 있으니 그는 부활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마지막 편지대로 그것은 ‘운명’이고, ‘삶과 죽음은 모두 자연의 한(같은) 조각’임이 증거되고 있다.
II. 노무현의 한국 현대사 이해
지난 국민장 기간 중 덕수궁 빈소 옆 정동 길에서는 그가 퇴임할 즈음 가졌던 한 대담 인터뷰가 한 시민에 의해서 반복되어 상영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그것을 보게 되었고 거기서 큰 충격을 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곳에서 1946년 해방 이듬해생인 자신이 어떻게 그 개인적인 삶을 한국 현대 정치사와 역사의 전개와 더불어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는지를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었다. 그러한 진솔한 삶의 내러티브들을 들으면서 그동안 가져왔던 많은 의문들이 풀렸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서 그 자리에 가보니 지난 한국의 현대사에서 민주화된 곳은 오직 정치계뿐이고, 언론이나 종교계, 학계나 경제계 등 다른 모든 분야는 여전히 과거의 부당한 역사가 청산이 안 된 채로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비록 그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다시 비민주적인 방식이 아니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대표적인 예로 ‘정수장학회’ 일을 드는데, 가난했던 중학교 시절 자신이 직접 장학금을 받았던 부산일보의 부일재단이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서 정수장학회가 되었지만 이미 법에 따라서 모든 것을 정리해놓은 상태이므로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불의한 과거가 청산이 되지 않은 가운데 형성된 한국사회의 기득 세력에 맞서서, 그러나 다시 특권이나 반칙의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원칙’과 ‘상식’과 ‘법’과 ‘합리’의 방식으로서 민주주의를 이어가고자 했지만 크게 얻어맞았고 매우 무력해 보였으며, 마침내는 죽어갔다.
훗날 “역사의 정통성에 대한 강한 집착”이라고 평가받는 노 대통령의 판단과 인격적 특성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의 여러 내러티브들 속에 녹아있었다. 이 내러티브들을 들으면서 이러한 이야기들이야말로 앞으로 후세대들이 한국의 현대사를 이해하는데 좋은 교과서로 쓰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1988년 13대 국회의 의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노동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돕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 전해에 대우조선 분규와 관련해서 ‘제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라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변호사업무 정지를 받은 상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1990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을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보는 것 같았다. 그 3당 합당을 ‘하나님의 뜻’으로 내세우며 민자당을 창당하여 14대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노무현의 판단에 따르면, 개인적으로는 그 전의 20여 년 민주화운동의 공적을 모두 날려버렸고, 그날 이후로 한국 정치는 회복하기 힘든 병을 앓게 되었다. 그것은 극단적인 지역감정의 병이고, 정치권에서 보편적 가치와 상식이 무시되는 병이었다고 한다.
노무현은 이미 1994년 자신의 책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YS가 3당 합당으로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회주의자들이 차지할 수 있는 장물의 수준은 한정되어 있었지만”, YS의 대권 장악과 함께 그들의 입지가 크게 변화되었다고 서술한다. 그것은 그들의 성공이 최고 권력의 차원으로까지 올라갔기 때문인데, 그리하여 퇴임시 인터뷰에서도 3당 합당은 “사회적 기백을 소멸시켰으며”, “적대관계를 이용해서 충동질하고 쓸어버려서” 성공했기 때문에 “옳은 일에 대한 동기를 사라지게 했다”고 비판하였다.
3당 합당 이후의 그의 정치 목표는 이렇게 “가장 위험하고 파괴적인 대세”였던 3당 합당과 더불어 창궐하게 된 한국 정치에서의 ‘기회주의’와 ‘지역분열’에 대항하는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영남의 모든 민주세력들이 당선가능성으로 인해서 모두 민자당으로 가버린 후 김정길 의원과 단 둘이 남아서 꼬마 민주당을 창당한 이야기, 그 후 통합민주당의 간판으로 지역감정의 벽을 깨고자 부산에서 계속 출마하지만 세 번의 낙선을 경험하였고, 특히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 부산에서 출마하여 낙선하자 ‘바보 노무현’이라는 명칭을 얻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라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유래가 없는 자발적인 시민 후원모임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한 때 자신의 대선 출마 결심도 한국 정치의 또 다른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이인제씨의 출현을 막으려는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한국 정치에서 기회주의의 불신과 지역대결의 적대를 극복하려는 그의 정치 목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 같이 일생동안을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서 싸워온 정치가는 세계에서 그렇게 많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의 삶의 행적으로만 본다면 남아프리카의 넬슨 만델라처럼 선거를 치루지 않고도 대통령이 되었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그러나 과거 정부들이 그를 “워낙 빨갱이로 덧칠을 해서”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노무현이 2002년 대선 전에 당시 시사평론가로 일하던 유시민과의 인터뷰에도 보면 그는 누가 김대중을 세차게 비판하면 일단은 DJ를 옹호하고 나선다고 한다. 자신과는 다른 호남출신이고, ‘빨갱이로 덧칠’되어 있어서 그에게 불리할 것이지만, 그래서 참모들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아무리 건의해도 소용 없었다고 한다.
그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김대중의 정치적 업적에 대해 세상이 “너무 야박한 평가”를 하고, “중요한 것이 과소평가되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과대평가”되었지만 자신은 그 평가가 달라질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또한 그에 대한 비판이 들끓어도 같은 진영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지적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유시민이 김대중 정권 말기의 여러 사건들을 들어서 “중요하지 않은 문제까지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았겠지요”라고 응수하자, “나는 대통령이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 문제가 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면 좋은데, 안 일어날 수 있는 시대를 대통령이 3, 4년 만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대응한다.
지금 들어보니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해 변호하는 것 같다. 대통령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고 임기의 짧은 기간 안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모든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상대방에 대한 너그러움”이 요청된다는 지적이겠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그런 너그러움을 갖지 못했고, 그래서 결국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갔다.
III. ‘정치가’와 ‘경제 CEO’의 차이는 무엇인가?
노무현은 고백하기를 자신에게는 새만금이나 이라크 파병, FTA 등으로 자기편으로부터도 세차게 비판받은 일보다 ‘열린우리당’이 깨진 것이 더 가슴 아팠다고 한다. 그 당은 자신의 일생의 정치목표인 지역통합과 기회주의 타파를 위해 실험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 후에 한국 국민들은 그런 소신의 노무현 정부를 무능과 준비되지 않은 천박함이라고 비난하면서 ‘CEO출신 성공한 샐러리맨’ 이명박 정부를 택했다. 모두가 그 대통령처럼 성공한 부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목도하게 된 것은 그것이 ‘정치’와 ‘경제’의 원칙 없는 합병이고, 경제에 의한 정치의 함몰을 가져오는 경제제일주의와 경제 환원주의라는 사실이었다. 이 선택의 결과가 어떤 일을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달리 택하지 않았다.
과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맹자는 왕이 이익(利)을 구하게 되면 그 밑의 신하도 이익을 구하게 되고, 다시 그 밑의 사람들도 이익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되어 결국 나라 전체가 모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만인 대 만인의 전쟁상태가 될 것임을 경고했다. 그러므로 정치와 경제, 정치가와 경제가의 역할 분립은 20세기 여성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도 잘 지적해주었듯이, 인간다운 공동 삶을 위해서는 꼭 지켜야하는 원칙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치의 수장으로서 그 수장이 되기 전까지 어떻게 하면 ‘이익’(利)을 더 낼 수 있을까만을 전문적으로 생각해온 경제인을 뽑았다. 그러니 나라에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잘 예상할 수 있고, 그래서 오늘 우리 상황에 대해 의아해할 필요가 없다.
노무현은 이 두 영역의 차이와 역할 분담, 그리고 그 둘의 건강한 협력과 협조가 어떤 것이어야 함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그가 2002년 대선을 앞두고서 행한 앞의 유시민과의 대담에서이다.
그는 거기서 CEO와 정치지도자를 축구경기에서의 선수와 관리자로 비유한다. 그에 따르면, CEO는 축구시합에서 어떻게든 골을 넣으려는 선수이지만, 정치지도자는 그 시합자체가 잘 운영되고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관리하는 관리자이다. 정치지도자는 경기 자체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축구장을 잘 만들어주고, 심판을 공정하게 보고, 조정과 중재를 통해 경기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정치에도 경영적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정치가의 역할은 크게 봐서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면서 시장이 실패하는 영역을 추슬러나가는 일이다. 그래서 “CEO에게 패배자라는 건 무의미한 것이지만 정치가에게는 패배자야말로 중요합니다. 정치가는 패자들을 챙겨서 함께 데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정치와 정치가와 대통령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이 언술보다 더 분명하게 오늘 우리 사회에 광풍처럼 불고 있는 경제 환원주의와 무한경쟁주의의 바람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게임의 관리자로서 공정과 원칙을 세우고 관리하고 조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선수처럼 직접 뛰어서 이익을 챙기려는 사회가 오늘 한국의 정치부재와 정치부패의 현실이라면, 노무현의 이 정리는 우리 정치가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패배자들을 챙겨서 함께 가는 것을 정치가의 핵심 과제로 보는 그는 지도자의 역사의식과 철학, 멀리 바라볼 줄 아는 통찰력과 판단력을 매우 중시여겼다. 참여정부가 하도 비판받고 비방을 받으니까 그 탄생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등을 돌렸고, 비서실 참모들, 심지어는 그 소신 강하던 대통령도 흔들리는 때가 있었다.
그러던 대통령이 ‘사실을 확인해 보자’는 생각에서 구체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지표를 통해서 그 성과를 증명해내고자 해서 엮어낸 책이 대통령 보고서<참여정부 4년의 국정 성과-미래를 향한 도전>이라는 책자라고 한다.
참여정부 출범 5년 차인 2007년 6월에 그 보고서를 엮어내면서 문재인 비서실장은 쓰기를, 모든 지표를 모으고 분석하고 살펴보니 복지 부분의 예산과 해외 자원 개발 사업 등 “올라가야 좋은 것은 모두 올라갔고, 낮아져야 좋은 것은 어김없이 낮아졌다”라고 종합 평을 했다. 노 대통령의 사후 지난달 29일에 그렇게 만들어진 보고서를 다시 『노무현과 함께 만든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펴내면서 편집자들은 당시 언로가 막힌 대통령의 마지막 선택은 책이었다고 전한다.
노 대통령은 당시 이 보고서를 통해서 참여정부 시절 특히 ‘경제가 문제’라는 지적에 대해서, 꼭 그런 것도 아니고, 그만하면 나무랄 것도 없고, 오히려 그가 정치를 그렇게 했듯이 경제에서도 “나라의 기초와 미래에 투자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슴 치며 호소하고 싶었다고 전한다.
보고서가 만들어진 후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친구들을 모아놓고 원래 2시간 예정으로 할 강연이었지만 거의 6시간을 들여서 그동안 참고 참았던 심정을 토로했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분명히 밝히기를 “시장은 사람을 위한 시장”이어야 하고, “경쟁은 사람을 위한 경쟁”이어야 하며, 성장도 마찬가지여서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 노릇하고 사는 사회”를 만드는 “근본적인 지향점”이라고 역설한다.
당시 한나라당 등 대선 후보들의 공약들을 보고서 그는 경제는 경제정책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이 추구할 가치와 역사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시하는 전략다운 전략, 공약다운 공약”이 나오기를 기대한다고 일갈한다.
‘보수’와 ‘진보’가 무엇인가라는 논의에서도 보수는 강자의 사상, 기득권의 사상이라고 먼저 밝힌다. 그러면서 보수주의자들은 각자 개인의 삶은 각자의 노력의 결과이므로 강자가 주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모두 좋아진다는 주장이지만, 그 보수인 강자는 경쟁 시장을 넓히기 위해서는 개방을 하자고 하면서도 약자에 대한 국가의 보호나 지원에는 반대하고, 힘에 의한 평화와 힘에 의한 질서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자신의 파악을 밝힌다.
반면 진보란 “힘 있는 사람이 누리는 권력을 약자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힘없는 사람의 연대와 참여를 중시하는 생각”이라고 분명히 정의하는데, 여기서 그는 다시 실현가능한 대안이 있는 진보, 현실에서 채택이 가능한 대안과 타협 가능한 수준으로 정책을 만드는 진보, 자원조달이 가능하고 배타적이지 않은 자주와 개방 지향의 진보를 지시한다.
그의 사후 우리는 그가 삶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을 놓고 이 진보주의 논의를 치열하게 밀고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그는 “학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한 치열한 주제의식과 문제의식을 담은 글 수십 개를 의욕적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그는 “근대 이후에 모든 사상은 결국 민주주의로 귀착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라고 말하면서 그 민주주의란 바로 “인간을 위한 사상”이고,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한 사상”이며, 그것이 “경제발전에도 가장 적합한 사상”이라고 확신에 차서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성숙한 민주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통합의 민주주의”를 위한 지도자의 조건을 말하면서 그 마무리를 한 마디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람이 되자’에 앞서서 바보가 됩시다. 제가 바보 전략으로 완전히 성공한 사람 아닙니까? 하여튼 여기 성공의 증명이 있으니까요... 말귀는 잘 알아듣는데 손해나는 일을 부득부득하는 사람, 이게 바보지요. ... 눈앞의 이익을 볼 줄 모르는 바보가 되자, 앞으로 우리는 손해나는 일만 계속합시다. 그렇게 사람을 모아봅시다. 함께 토론도 하고 공부도 합시다. 그리고 스스로 지도자가 되려고 노력합시다”라고 쓰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정치와 경제의 차이를, 정치가와 CEO의 다른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정치가의 길을 가고자 했다: “정치는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이지만 시장은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시장이 우리 정치를 지배하게 됐을 때 가치의 위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라고 지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 선거에 나왔을 때 자신이 정치하는 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을 호소하는 그에게 권양숙 여사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고 한다: “당신이 정치 안하면 한 달 수입이 얼만데, 당신을 내놓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애국 충분히 하고도 남았어요”라고. 이렇게 한국 사회는 자신들의 경제 활동과 이익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 근본과 기초를 놓아주는 ‘정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은 대통령에게, 또한 그것을 같이 감내하느라고 많은 사적인 원함과 즐거움과 편안함을 희생한 그 가족들에게 고마워하고 존경을 보내기는커녕 오히려 작은 실수와 중요하지 않은 것을 과대하게 부풀려서 비난하고 그들을 죽음과 절망으로 몰고 갔다.
우리 시대는 그렇게 잔인했으며, 동정심이 없고, 연민이 없으며, 불신이 만연해 있다. 그래서 이제는 살아 있지 않아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검찰은 더 안전하게 ‘혐의’를 씌웠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도 놀라워하지 않는다.
IV. 죽음의 방식 ‘자살’
이번 노 대통령의 서거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주제 중 하나가 그의 죽음 방식에 관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이번 일을 접하기 전에도 이미 여러 형태의 ‘자살’을 경험했으므로 그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몸을 던져서 죽은 일은 형언하기 어려운 충격과 아픔을 주었다. 무엇이, 왜, 어떤 일들이 그로 하여금 그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하였을까?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내 앞에는 그가 지난 4월 30일 검찰 출두를 위해서 검은 색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차에서 막 내려서 걷고 있는 모습의 사진이 놓여있다. 뒤에는 서류가방을 든 문재인 전 비서실장이 따르고, 둘은 모두 입술을 지그시 물고서 약간 먼 곳을 응시하며 걷는다.
이로부터 한 달 여후 발생한 그의 죽음에 대해서 보수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진보그룹의 김지하 시인이나 <녹색평론>의 김종철 교수도 인간의 생물학적인 조건을 들어서 그의 죽음을 ‘자살’로 먼저 규정하고 반생명적인 선택으로 책망했다. 지난 5월 29일 금요일 그의 영결식이 있은 후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은 그가 ‘자살’ 했으므로 ‘죄인’이고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설교했다고 한다.
어느 사람이, 어느 종교가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은 사람을 무조건 두둔하고 용납할 것인가? 하지만 이러한 한국 교회들의 일반적인 낙인과는 달리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확신과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죄다’라는 말을 이미 죽은 이와 유족들에게 한 번 더 정죄의 낙인을 찍는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권고한 기독교 그룹도 있다. 또한 그 권고문은 자살이란 비극적인 결말만을 볼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자살에 이르게 한 과정에 대한 면밀한 성찰이 전제되어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에 대한 종교적인 불허의 언어가 오히려 “죽을 사람을 살리는 용도”로 쓰여야 함을 현명하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고자 한다. 앞의 김종철 교수는 “민주주의의 생물학적 뿌리”를 말하면서 모든 인간은 생물학적 조기출산으로 인해서 유아적 나르시시즘을 갖게 되고, 그 보상으로 부와 권력과 명성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지시했다. 그것이 가장 잘 채워질 수 있는 사회·문화적 방식이 민주주의이지만, 그 반대가 ‘용산참사’나 ‘전직 대통령의 자살’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인간이 그 생물학적 조기출산으로 인해서 자신의 생존과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전개시킨 ‘정신’의 힘을 지시하고자 한다. 정신의 존재인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스스로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과 생명에게까지도 ‘NO'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함이다. 철학적 인간학자 막스 쉘러는 이 능력이야말로 인간의 모든 종교적, 문화적 성취의 근거이고, 이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의 힘이야말로 동물과 다른 인간 고유성의 뿌리가 됨을 밝혔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먼저 이러한 인간적 자기부정의 용기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굳이 이러한 서양 생물학자들의 이야기를 빌지 않더라도 보통 ‘자결’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는 이 죽음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맹자는 이미 오래 전에 인간은 누구나 살고자 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이 없고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없지만 그 죽는 것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利와 義가 충돌하였을 때 인간으로서의 본분과 이름을 망각하고 利와 짝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에게는 그렇게 원하는 生보다도 義와 이름을 더 중히 여길 수 있는 ‘사생취의’(捨生取義,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한다)의 힘과 용기가 있음을 밝혀주었다.
혹자는 이번 노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서 그는 지금까지 남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결단의 방식으로 정치적 난관들을 헤쳐 왔으므로 이제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고 ‘승부수’를 띄운 것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했다. 거기에 대한 한 대답은 죽음 앞에서도 그렇게 ‘승부수’를 운운하며 삶을 온통 승부와 경쟁의 일로 보는 일은 매우 비인간적인 태도라고 비판한다.
나는 이 두 의견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먼저는 노 대통령의 죽음을 보고서 그가 왜 그런 승부의 마음이 들지 않았겠는가 자문하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방법이 막혀버렸을 때, 자신의 지금까지의 이름과 정의가 땅에 떨어져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버리려고 할 때 인간은 그렇게 원하는 生조차도 포기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한편 그러한 승부의 마음이 아니었고, 오히려 한없는 절망과 좌절 속에서 더 이상의 추스름과 행위함을 포기하고 無로 돌아가고자 결정한 것이었다고 해도, 나는 그것이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는가라고 묻고 싶다.
이번 노 대통령의 죽음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우리 역사상의 이순신이나 조광조 등과 비교해 보기도 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특히 여러 관점과 부분에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오버랩되었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기득권과 보수의 세력들이 운집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 자체가 하나의 자살행위가 아니었나? 그는 그렇게 자신이 죽는 것을 통해서라도 마지막 승부를 띄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그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며 죽어갔을 때 그는 예상 밖에 너무나 일찍 찾아온 실패에 좌절했고, 자신의 죽을 ‘운명’에 전율한 것이 아니었나? 그가 그 죽음의 십자가 위에서 ‘부활’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렇게 ‘사람의 아들’(人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자살과 타살, 믿음의 자기 내어줌과 절망, 마지막의 희망과 절망이 모두 중첩되는 것이라면 나는 같은 사람의 아들 노무현의 죽음도 그와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 실패를 경험했다. 그것도 그의 하나님 나라 사업을 금전적으로 뒷받침해주고,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어쩔 수 없이 필요했던 몸과 생명의 필요물들을 채워주는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나중에 성서기자들이 예수운동의 회계담당자 유다의 행위를 마치 하나님에 의해서 모두 예정되어 있던 통과의례로 그려서 그렇지 여기서도 인간의 많은 실패와 좌절은 바로 그 몸적, 생명적 필요물과 연관되어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일이 예수에게서도 너무나 인간적이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결코 영웅이 아니었고, 타고난 성자도 아니었으며, 가족들이 있었고, 사랑하는 자녀와 그 자녀들을 삶의 모든 것으로 여기는 아내가 있었으며, 가난했던 형제와 자매, 친척과 이웃들이 있었다.
오늘날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에 의하면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라는 명칭이야말로 이사야서 등을 열심히 읽던 예수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가장 확실하게 썼을 것이라고 한다. 노무현은 잘 알려진 대로 “사람 사는 세상”이 그의 정치적 목표였고, 그가 가장 좋아했던 노래가 ‘사랑으로’, ‘상록수’, ‘아침이슬’ 등이었다.
그는 참으로 인간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의 아들에 의하면 보통 자수성가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냉혹함과 엄함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이 학벌이 낮으니 아이들에게는 매우 강요했을 것 같지만 아들 건호씨에 의하면 그는 “사자 새끼를 절벽 밑에 떨어뜨린다던가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가 고등학교 때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공문수학을 그만둘 수 있게 해주었고, 후에도 그가 싫다고 하는 일을 강요한 적이 없으며, 대학갈 때 아들에게 그 이름이나 학과에 그렇게 좌우되지 말고 시민으로서 소양을 쌓기 위해서 간다고 생각하고, 나중에 다른 공부를 하고 싶으면 나이 40살까지는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정치를 고만 두고서라도 밀어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고 한다.
그렇게 따뜻했던 노무현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 불우함에서 탈출한 이야기만하지 오히려 그 불우한 사람들을 있도록 한 우리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불만이라고 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자수성가한 ‘졸부들’이나 ‘신흥부자들’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승부하려하지 않았고, 공동체와 함께 함의 삶을 꿈꾸었으며, 그런 자신의 삶을 “시지프의 신화”의 삶으로도 비유했다.
자신의 지나온 삶은 언제나 성공과 실패가 하나인 삶이었다고 말한다. 패배는 승리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었고, 새로운 도약은 좌절의 잿더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지 하나로는 헤쳐 나갈 수 없었던 정치인의 길”이었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는 그 산의, 또 그 강의 높고 깊음을 탓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변해야”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백하기를,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숙명이었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오늘 그의 마지막 유서에서 들은 것과 유사한 고백을 이미 2000년대 초에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무모하다’는 식으로 편파적인 평가를 하는 것을 거부했다. 오히려 자신의 길은 ‘택도 없는 일의 시도’가 아니라 그와는 분명히 다른 ‘가능성이 있는 도전’, 또는 ‘쉽지는 않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해 오는 길이었다고 강술한다. 그래서 그는 온갖 비난과 비방 속에서도 대통령직의 4년여를 지내고 난 시점에서도 “저는 그냥 제가 할 도리를 다한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므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불의에 대해 분노할 줄 알고 저항”하므로, 그래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탐구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도를 찾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설득하고 조직하고 권력과 싸우고 권력을 잡고 그리고 정책을 실행했다고 자신의 대통령직의 일을 설명한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숙명’으로 느꼈던 ‘세계사랑’(L'Amour Mundi)에서 자신의 모든 정치와 행위의 힘을 얻었던 것이다.
이렇게 살았던 노무현의 죽음을 위에서처럼 우리의 어떤 종교적 상상력을 빌어서 굳이 예수의 죽음과 비교하지 않아도 한 수의학자가 우리 사회에서 허용된 존엄사와 연관시켜 사고한 성찰이 좋은 지침이 된다. 그에 따르면 이제 우리가 육체적 조건에 따라 존엄사를 인정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면 정신적 이유에 의한 존엄사도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물론 정신적 존엄사의 여부는 당사자만이 알 수 있지만 이때 중요한 것은 죽은 자가 그동안 추구하고 살아온 삶의 자세와 가치가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야말로 철저히 비주류로서 그렇게 치열하게 대한민국을 ‘사람이 사람 노릇하는 사회’로 만들고자 했고, ‘전략은 타협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의 원칙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려움을 무릎 쓰고 손해 보면서, 바보 노릇하면서”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끝까지 살아왔으니 그의 죽음을 존엄사로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니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의 존엄사 이후에 온 나라에 퍼진 추모와 각오는 그도 부활했음을 선언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뜨거운 ‘세계사랑’으로 이 땅에 온 예수의 부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하나님의 아들’, ‘사람의 아들’인 예수와 노무현은 그렇게 부활했고, 우리는 이렇게 21세기 벽두에 이 한국 땅에서 사람의 자식들이 그리스도로 부활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V. 노무현 신앙과 종교, ‘보편종교’(religio catholica)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이 한 때 도덕적 엘리트주의에 빠져있었다고 고백했다. 초선 국회의원 시절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원칙을 관철하는 사람의 눈에 보통사람들은 좀 우습게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적 엘리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이 된다는 것” 같다고 토로한다.
그는 대통령직을 마무리할 즈음에는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그 대신에 “사람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런 전략”을 말한다. 그래서 그렇게 기회주의와 변절을 싫어했지만 2007년 6월에는 “남의 기회주의는 용납합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절대 기회주의에 빠지지 맙시다. 오로지 소신과 원칙을 가지고, 그러나 사람을 널리 포용하면서 걸어갑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전부터 삶의 정치에서 끊임없이 ‘보편’을 이야기해왔고, ‘상식’과 ‘원칙’을 주창해 왔으며, ‘공정’과 ‘합리’를 말해왔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과 양심”을 주창했으며, 그래서 ‘대화와 타협’, ‘통합과 조정’을 이야기했고, 그가 존경하는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위해서 남북전쟁도 감수했지만 ‘연방의 통합’을 인권과 노예해방보다 오히려 위에 두는 것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나는 노무현의 참된 신앙과 신뢰가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거나 여타 종교의식에 참여하지 않아서 단순히 ‘비신앙인’이거나, ‘비종교인’ 또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그는 참으로 깊은 신앙인이었으며, ‘가장 적게 종교적이면서 가장 깊고 크게 신앙하는’, 그래서 우리 시대에 참으로 ‘믿음’과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이라고 본다.
매우 드물지만 그가 ‘신’과 ‘진리’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한 언술을 보면, 그는 신의 진리와 그 절대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도 그 신의 진리를 인식하고 해석하고 전달하는 사람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그 사람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절대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래야만 민주주의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덧붙인다.
이것은 노무현의 인간에 대한 깊은 신앙과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 인간 인식의 오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궁극과 절대를 찾아가고자 하고, 또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오늘 우리 시대 어느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신앙의 길을 갔다고 보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이후’(postmodern)의 사람들이 과거 전통의 형식과 구속을 넘어서 ‘세속적인 방식’(a secular age)으로, 그러나 그러면서도 더욱 더 진지하고 깊이 있게 새로운 종교와 영성의 길을 찾아 간다면 나는 노무현의 삶도 그런 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설사 그가 그것을 잘 의식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예전에 예수가 ‘신’을 모독했고 ‘성전’을 부수려한다고 죽임을 당했듯이,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이고 청년들을 선동하여 시의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처형되었듯이, 그는 우리 사회의 기득과 질서를 지키려는 ‘보수’(conserve:지키다)에 의해서 죽어갔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기까지, 죽는 순간까지 ‘사람’과 ‘이웃’과 ‘하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요즈음 한국 사회에 다시 무서운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정치계나 노동계, 종교계, 학계, 문화계 등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어떤 논쟁이나 토론이 일어나면 한 쪽은 어김없이 다른 한 쪽을 ‘좌파친북세력’이라는 간단한 말로 이름지어버린다. 우리 사회의 ‘보수주의자’들에 의해서 주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마치 ‘절대악’과 ‘근본악’을 지칭하면서 자신들은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절대선’으로 긍정하는 언어처럼 쓰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하늘 아래 인간 세계의 어느 누가 그렇게 절대적인 선을 주장할 수 있으며, 이 세상의 어느 존재가 그 정도로 자신의 존재를 영속적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있을까? 오늘 한국 교회가 그 절대주의적 배타주의와 중세적 권위주의로 ‘뉴라이트’가 되어서 매번 하나님을 부르고 신앙에 대해 말하면서도 ‘절대악’을 상정해 놓는 것은 바로 선과 악을 자신들이 규정하려는 원죄적 ‘반신앙’과 ‘불신앙’이 아닌가 묻고 싶다. 또한 항상 “억눌린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하면서도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권력’과 짝하려 한다면 바로 이들이야말로 지독한 무신론자들이고 비신앙인이며, 반종교적인 모습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70년대 조영래 변호사는 그의 『전태일 평전』에서 이러한 ‘사이비 신앙인’들이 주장하는 얼쩡거리는 동참과는 달리 전태일의 힘없는 사람들과의 동참과 ‘돌아가겠다’의 의미는 ‘목숨을 들어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었고,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거는 단호한 투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40여년 후 그 전태일의 모습에 다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겹쳐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일찍이 서구에서 17세기의 유대교 사상가 스피노자(1632-1677)는 당시 신구교 사이의 극심한 종교 전쟁과 근대국가 태동기의 정치적 혼란기에 그 시대를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로서 ‘보편적 종교’(religio catholica)를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여전히 중세말기의 시대상황에서 계시종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면서 미신으로 전락하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신뢰, 관용과 자유 대신에 미움과 불화, 불안을 불러일으키는 전쟁의 진원지가 되는 것을 보면서 그 종교들이 권위의 근거로 보는 성서를 ‘자연적이고’ ‘역사적으로’ 새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사람들이 올바른 방법으로 신에게 순종하고 평화를 원한다면 ‘종교’는 자신의 역사적 상황에서 ‘정치’ 아래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종교는 신에 대한 순종만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과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로 이야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에 대한 세속적 해석과 선민의식에 대한 해부로 스피노자는 자신이 속해있던 유대교로부터도 파문당했고, 기독교인이나 정통철학자들로부터도 무신론자나 철학적 이방인, 악의에 찬 영혼 등으로 비난받고 배척당했다.
그런데 그가 그처럼 종교의 특권을 해체하고, 정치와 종교의 간격을 주장했으며, 성서의 계시를 역사화시킨 근거는 다름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그가 나중에 “신에 미친 사람”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온 세상을, 이 세상 전체와 온 자연을 바로 신의 영역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특정한 장소나 시간, 인물이나 사물에만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만물과 전체, ‘보편’과 ‘이성’, ‘자연’과 ‘자유’ 모두가 신의 영역임을 믿은 것이다. 오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목숨을 건 보편과 ‘상식’과 ‘자연’과 ‘합리’, ‘대화와 타협’에 대한 강조를 보면서 이 스피노자의 고독과 신앙이 생각났고, 또한 오늘의 기독교 뉴라이트와 교회들에게 이 스피노자 『정치론』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동안 많이 들었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학구열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학벌 때문에 멸시를 당하고 조롱당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학자 노무현”이었고, 그래서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이정우 교수는 학자 군주 세종이나 정조를 들면서 그를 “학자 군주에 비견할 만하다”고 되돌아보았다.
나는 그의 모든 정치가 바로 이러한 ‘호학(好學)’에서 나왔고, 그의 모든 지역주의 타파와 권위주의 청산, 권력분산과 지역균형발전 등의 강조는 그의 ‘합리(合理)’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신앙과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끝없는 존경에서 나온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엄청난 시스템 혁신”, “메뉴얼”과 “표준화”에 대한 강조와 그의 ‘위임형’ 민주적 리더십은 앞의 스피노자가 ‘자연’과 ‘신’의 하나됨을 보면서 새로운 성서비평과 ‘보편적 종교’로서 모두가 각자 독자적으로 성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음을 강조한 것과 비슷한 정신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그가 비록 ‘학벌은 낮았지만’, ‘상고 출신이지만’ 한국 사회가 오늘날 교육에서 그렇게 많은 것을 쏟아 부으면서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목표가 어떠한 환경에 처하게 되더라도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답을 찾아낼 줄 아는 ‘창조인’과 능동적이고 자발적이어서 스스로 정보를 모으고 생산하여 새로운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능동인’, 더불어 사는 삶의 정황에서 약자를 헤아리고 배려하고 책임질 줄 아는 ‘도덕인’의 양성이라면 나는 그 목표가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그렇게 학벌 때문에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받았지만 자신의 삶 전체로 우리 교육의 나아갈 방향과 방법도 가르쳐준 것이다.
여성문제와 페미니즘과의 관계에서도 이번 서거를 맞이하면서 <여성신문>은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여성정책에서만은 이의 없이 역대 어느 정보보다 우수했다고 지적한다. 노무현은 자신을 “논리적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며, 원래는 여느 경상도 한국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폭력도 쓰고, 젊었을 때 성추행도 했던 사람이지만 80년대 사회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젊은 학생들과 만나면서 자신의 여성관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고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선천적으로 불합리한 차별을 싫어하고 엘리트주의를 거부하는 자신은 그래서 “필연적으로 여성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배움을 통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새로움에 내어놓고 고쳐가는 노무현은 그래서 참여정부 아래서 호주제가 폐지되도록 했고, 성매매방지법이 제정되었으며, 여성총리, 여성법무장관 등을 배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치생활 내내 한국의 언론개혁을 부르짖었던 것도 오늘날 지식과 정보의 사회에서 언론이 얼마나 중요하고, 거기서의 왜곡과 거짓이 어떻게 핵심적으로 국민들을 우민화시키고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일보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첫째 그들이 법 위에 있을 정도로 “너무 세고”, 둘째는 과거 친일언론과 독재 아부한 언론이 여전히 한국의 일등 신문으로 자리하는 것이 한국 국민에게 “너무 수치스럽고”, 마지막으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겁을 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먼 후일 자신에게 참여정부에서 가장 보람 있는 정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언론 정책, 언론 대응이라고 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자신이 역부족이고 한계가 분명하지만 “민주주의의 진보에 꼭 필요한 과정”임을 강조했다.
그 싸움에서 역부족이었던 그는 그렇게 갔고, 그러나 400년 뒤라도 다시 ‘스피노자 르네상스’를 맞이하여 근래에 서구에서 스피노자 사상이 들뢰즈(Gilles Deleuze)나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등의 가장 앞서가는 정치사상가들에 의해서 다시 빛을 보고 있다면, 나는 노무현의 죽음도 그렇게 헛되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정신은 부활로 이어져서 남은 우리가 완성할 것이다. 그것은 ‘천명’이고 ‘운명’이기 때문이다(成之者性也).
VI. 마무리하는 말
지난주의 한 외국인 저널리스트는 노무현의 비극은 단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이루고자 하는 주변국들에서도 유사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그에게 호의를 보이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하나의 민주주의의 퇴보로 보인다고 썼다. 그렇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아시아 어느 국가 대통령이 그렇게 열악한 환경을 딛고서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며, 낮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평생 공부하여 학자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오늘날 세계가 서구와 미국과 그 언어와 자본에 한 없이 떨고 있을 때 아시아의 어느 지도자가 하나의 민족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 힘으로 자유롭고자 했으며, 나라의 위신을 높이고 국익을 증진하고자 애썼는가? 또한 어느 국가에서 그 지도자가 인류가 21세기가 되도록 풀지 못하고 있는 동서 이데올로기의 악제를 풀기 위해서 휴전선을 넘어갔으며, 퇴임 후에는 다시 고향과 농촌과 시골로 돌아가서 서민과 농부의 친구가 되고자 했는가?
한국 대학의 한 외국인 교수(Aaron Olds)가 지적한 대로 이번의 세계금융위기나 이라크 전쟁 등으로 전 세계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큰 손실과 고통을 입었는데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을 포함해서 어느 대통령, 어느 CEO, 어느 은행가 한 사람도 자신의 행위 때문에 후회하는 사람이 없고, 법정에 소환될까봐 두려워하는 사람이 없으며, 더군다나 자기 몸을 던지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노무현에게 호의와 존경을 보내야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그런 지도자들에 비해서 노무현은 진정으로 자신의 실수와 한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했으며, 부끄러워했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던졌으니 그런 대통령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그래서 그의 삶과 죽음은 한 정치학자에 의해서 “한국 정치지도자의 표준”(Korean Political Standard)을 만들어냈고, 지금은 그러한 국가 지도자의 표준에 대한 “국민적 합의”(Korean Consensus)가 생겨나는 과정이라고 평가받았다. 이러한 노무현의 상징은 머지않아 “아시아 민주주의의 표준”이 될 것이며, 이제 그것으로 아시아에 대중문화의 한류를 넘어서 “정치문화의 새로운 한류”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전망되었고, 나는 그러한 정치적 감지와 전망에 깊은 동감을 보낸다.
하지만 나 자신은 여기서 더 나아가고자 한다. 이번 그의 영결식과 노제를 보면서 노무현의 상징은 단지 그러한 정치적 상징만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세계 인류가 공동으로 동서의 핵심 종교 전통들을 가지고 함께 탄생시킨 종교적 ‘숭고’로 보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지도자의 영결식에 동서의 종교전통들이 그렇게 모두 함께 했으며, 어느 누구의 떠나감에서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에 이어서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정서인 ‘샤머니즘’과 ‘유교’로부터 그러한 감동으로 마중을 받았겠는가? 그의 영결식에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했다면 바로 그의 삶 자체가 이 모든 전통의 젖줄로부터 먹고 자라났다는 의미이다. 그날의 의식 집행자들의 말대로 노무현 살아 생전의 삶에서 그 모든 종교 전통들이 함께 역할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는 21세기의 오늘에 인류의 종교 전통들을 그렇게 하나의 살아있는 제의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우리 민족의 가능성에 대해서 깊은 자부심을 느꼈으며, 그리고 무한한 책임감과 역할을 보았다. 세계만방이 지켜본 그날의 비탄과 장엄과 부활은 민주주의의 퇴보가 아니라 더 높은 미래로 우리를 끌고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그렇지만 예수가 떠난 후 예루살렘의 성전은 50년도 안되서 모두 허물어졌으며, 민족은 흩어졌고, 고통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순결한 이의 피는 그렇게 역사에서 그 값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떠나면서 자신들에게 들려주었다고 전하는 요한 공동체의 다음의 말을 다시 우리 것으로 되새기며 오직 하늘과 성령의 인자하심과 용기를 빌 뿐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요한복음 12-1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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