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vel & Others/스크랩한 좋은글 과 사진

[스크랩] 22년 전 그대로...박래군만 감옥에 갔다

Steven Kim 2010. 1. 15. 15:03

아마 상계동을 비롯한 웬만한 철거지역 '청소'는 모두 끝났을 때였을 것이다. '철거민', '재개발'이란 단어가 등장하기 시작한 무렵, 1988년이었다. 언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눈과 귀가 막힌 국민들은 곧 들이닥칠 외국인 손님맞이에만 분주했을 테다.

 

태극 문양의 끝을 곱게 말아돌린 대회 심볼, 상모를 쓴 호돌이가 '경축 24회 서울올림픽대회' 문구와 함께 육교에 다닥다닥 붙여지는 등 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던 바로 그해 6월 4일 오후 4시경,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에 한 학생이 올라가 외쳤다.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그는 곧 자기 몸에 시너를 붓고 불을 그었다. 분신. 그의 옷이 빠르게 타들어가 몸에 엉겨붙었고 불길은 곧 온 몸에 퍼졌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검은 몸뚱이로 한강성심병원에 옮겨진 그는 죽음의 문턱을 몇차례 오가다가 결국 이틀만인 6월 6일 12시 23분 숨을 거뒀다.

 

이 대학 인문대학 학생회장이었던 박래전. 그의 나이 26살이었다. 

 

  
1988년 6월 4일 분신한 박래전 열사 노제
ⓒ 박래전기념사업회
박래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에 묻힌 박래전 열사
ⓒ 박래전기념사업회
박래전

시커멓게 탄 동생을 지켜보던 스물 여덟 문학청년

 

숭실대를 위시한 서울의 대학생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박래전이 외쳤던 구호를 함께 외쳤고 거리 곳곳에 붙어있던 호돌이를 떼어내 태웠다. 그의 영정 뒤로는 "열사정신 계승" 펼침막과 수많은 만장이 뒤따랐다. "살인정권" "민주주의" 함성이 거리를 메웠고 학생들은 최루탄에 신음하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스물 여덟이던 그의 둘째형은 시커멓게 탄 동생의 목숨이 꺼져가는 순간을 지켜보며  오열했으리라. 형과 가족은 동생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했다. 당시 아직 환갑도 지나지 않은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땅에 들어간 그의 관 위로 흙을 뿌렸다. 한 명의 열사가 또 그렇게 검은 몸을 이끌고 하늘로 갔다.

 

동생의 죽음은 연세대 문학회 소속으로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문학청년 둘째 형의 삶을 뒤바꿔놓는다. 1987년 첫 수감지였던 대전교도소에서 목격한 비전향장기수들의 견결한 삶이 형의 고민을 깊게 만들어 놓았다면 이제 동생의 죽음이 그에게 또렷한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형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아래 유가협) 활동을 시작으로 인권운동사랑방에 몸담으며 그간 '대한민국에 도입될 수 없는 개념'이었던 '인권'에 천착하게 된다. 90년대 초, 제 몸을 불사른 꽃다운 청춘 50여 명의 장례를 도맡아 열사들의 하늘길을 배웅하는 게 그 시작이었다.

 

시나브로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대학 문학회 절친 우상호가 국회의원이 될 정도로 시대가 바뀌었다. 마치 학생운동생활을 보상이라도 받는 것처럼 사람들이 '당'으로 '정'으로 '청'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묵묵히 인권 현장을 지켜왔다. 어쩌면 형의 시대적 책무는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동생을 비롯한 수많은 열사들에게 한 약속을 제대로 지킬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장으로 몇 개월 일한 것을 제외하고 그는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2001년엔 '독립적인 국가인권위원회 설치'를 요구하며 명동 성당 들머리에 스티로폼을 깔고는 다른 인권운동가들과 노상 단식투쟁에 나섰다. 서울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졌지만 침낭만 덮고 맨 바닥에서 날을 넘겼다.

 

심지어 2002년 3월 경기도 평택의 장애인 시설 에바다 농아원 정상화를 추진하면서는 비리재단 측으로부터 똥물 세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에바다 장애인들의 인권수호 의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동생 죽은 지 21년, 남일당 건물에서 다시 불에 타 숨진 사람들

 

  
지난 2002년 3월 19일 에바다 사태를 해결하고자 에바다농아원을 방문한 박래군 이사(오른쪽)와 박경석 이사가 농아원측 관계자들로부터 똥물세례를 받고 망연자실해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박래군

  
지난 1988년 6월 6일 마석 모란공원에서 있었던 박래전 열사 안장식. 하관 후 백기완 선생이 관 위로 흙을 뿌리고 있다.
ⓒ 박래전기념사업회
박래전

2006년에는 평택 대추리에서 인권지킴이 활동을 하다가 조백기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와 함께 구속되기도 했고 2008년 새해 벽두 인수위원회가 국가인권위원회의 대통령 직속기구 전환을 꾀하자 주저없이 다시 명동성당 바닥에 누웠다. 

 

어느새 그는 대한민국 인권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거창한 직책과 직위도 없었다. 그저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일 뿐이었다.

 

그리고 2009년 1월 20일.

 

숭실대학교 학생회관 옥상만한 높이의 용산 남일당 건물에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몸에 불을 맞아 검게 숨졌다. 그의 동생이 그리 된 지 21년 여가 흐른 뒤였다. 

 

정권과 사법기관, 언론은 본질을 싹 덮고 현상의 책임을 철거민들에게 돌렸다.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현장은 을씨년스럽게 방치됐다.

 

공포와 은폐는 인권의 반대개념. 당연하다는 듯 형은 맨 앞에 나섰고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형은 참사 직후인 2009년 1월 23일 <인권오름>에 쓴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올해 봄에는 모든 진보운동이 인권운동이 될 것 같다. 권리를 잃은 시대, 폭력이 극단적으로 난무하는 시대, 표현의 자유마저 억압받는 시대에는 권리를 찾는 모든 운동이 인권운동이 된다. 그야말로 인권은 저항의 언어가 되고, 저항의 논리가 된다... 이런 봄을 그린다면 이 겨울이 춥지만은 않다. 그런 봄을 이 겨울에 준비해보자. 봄은 준비하는 자의 가슴에서부터 오지 않겠나."

 

그러나 춘래불사춘. 그가 그린 봄은 그 해에 오지 않았다. 결국 계절을 한 바퀴 돌아 2009년을 하루 남기고서야 겨우 용산 희생자 장례 일정에 합의할 수 있었다. 총리는 유감 표명의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3000쪽'과 '진상규명'은 끝내 염원으로만 남았다. 1년간 냉동고 안에 있었던 시신들은 해를 넘겨 2010년 1월 9일에서야 좁은 서울역 광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범대위 활동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수배의 덫에 걸린 형의 삶도 내내 겨울이었다. 우선 동생의 추모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4월 4일 숭실대 추모식에도, 6월 6일 모란공원 추모식에도 형은 갈 수 없었다. 단 한번도 빠지지 않은 행사였다. 대신 형은 편지 한 통을 동생의 벗들에게 전했다.

 

"요즘 제 심경이 참으로 착잡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함께 해야 하는데 답답하게 갇혀 지내는 이렇게 글로서나 제 얘기를 전할 뿐입니다. 제 동생 래전이가 바라던 세상이 제가 가는 인권운동의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인데 이 길이 종종 힘들게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음만이라도 같이 하는 많은 이들이 있기에 올해도 어김없이 래전이 묘소를 찾아줄 이들이 있기에, 이 힘겨운 시절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제 대신 동생의 영전에 소주 한잔 올려주시고 담배 한 개비 태워주십시오. 그리고 죽은 동생 생각에 더해, 만날 수 없는 처지의 저 때문에 더욱 서럽게 우실 어머니를 꼭 안아 주시기 바랍니다...

 

제 동생 아직도 스물여섯의 얼굴로 여러분을 맞지만 그가 살았다면 벌써 마흔 일곱 장년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날에는 제 동생과 소주 한잔 하면서 밀린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제 대신 동생의 말벗이 되어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2009년 6월 래전이 둘째형 래군"

 

9개월여 병원 영안실과 명동성당 영안실에서만 지내던 그에게 "용산참사 철거민 희생자들을 마석 모란공원에 모신다"는 결정이 전해졌을때,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동생을 그 곳에 묻고 22년, 인권운동에만 매진했던 그에게 이 어처구니 없는 '반복'은 믿기 힘든 것이었을 것이다. 형은 그의 동생 곁에 다시 다섯 '형제'를 눕혔다.

 

유가족들의 삼우제가 끝난 1월 11일 오후, 명동성당에서 나온 그는 "씩씩하게 다녀오겠다"면서 스스로 경찰 호송차에 올랐다. "세입자 철거민들의 권리는 여전히 개발이익이라는 공룡에 희생되고 있다"면서. "용산참사의 완전한 해결은 이 같은 문제들까지 함께 해결하는 것"이라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열사의 뜻을 이어 용산참사의 진상규명과 세입자들의 권리옹호를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라면서.

 
우리 시대 인권 상징이 구속되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심드렁한가

 

  
11일 오후 3시 이종회·박래군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 남경남 전철연(왼쪽부터) 의장 등 용산참사 관련 수배자 3인이 경찰에 자진출두하면서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권박효원
용산 참사

박·래·군.

 

박래전의 둘째 형 박래군은 그렇게 끌려갔다. 그의 후배인 시인 나희덕은 박래군에 대해 이렇게 썼다.

 

"... 졸업 후 누구는 언론인이 되었고 누구는 교사가 되었고 누구는 학원강사가 되었고 누구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누구는 주부가 되었고 누구는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 박래군 선배는 어떤 생업도 없이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지키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모두가 꿈꾸었지만 끝내 가지 못한 길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그리고 변함없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못내 자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졸업 후에 그를 몇 번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를 우리 사회의 정의를 잴 수 있는 척도로 여기고 있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중에서)

 

예상된 바 박래군이 결국 구속됐다. 경찰은, 그가 눈감고도 줄줄 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사례를 조목조목 들이댈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모든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돌릴 것이다.

 

소설가 김별아가 <한겨레>에 쓴 글을 제외하고, 언론은 그의 구속 소식을 짧은 단신으로만 전한다. "우리 사회 정의의 척도"가 갇혔는데도 사회는 심드렁하다. 마치 사태의 '일단락'이라는 듯. 어쩔 수 없는 '귀결'이라는 듯.

 

우리는 용산사태 해결에 미온적인 정권에 분노하지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재개발의 달콤한 유혹에 또 얼른 귀를 연다. 인권이 옅어지는 사회를 격하게 통탄하지만, '넓은 평수의 아파트'로 대표되는 욕망은 계속 부풀어 오른다. 인권의 가치를 격하시키지는 않을지언정 결코 그것을 돈의 가치와 함께 저울에 올리지는 않는다.  

 

박래군의 발을 묶은 사람은, 그에게 풍찬노숙을 강요한 사람은 그리고 그를 기어이 감옥에 넣은 사람은 결국 우리 아닌가. 그의 동생 박래전이 산화한 지 22년, 박종철이 죽은 지 오늘로 꼭 23년. 당시 거리에서 열사 정신을 계승하겠다며 피터지게 싸웠던 대학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시대, 하지만 그 의지는 이미 희미해졌고, 대신 평생 그 의지만 붙들고 산 사람은 감옥에 갔다.

 

  
지난 2003년 6월 동생 박래전 열사 추모식을 맞아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묘역에서 분향하고 있는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그는 수배로 인해 2009년 처음으로 추모식에 불참했다.
ⓒ 박래전기념사업회
박래전

1988년 50대 나이에 박래전의 관 뚜껑에 흙을 던져넣었던 백기완은 2010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용산참사 희생자 범국민장에서 조사를 읽었다. 군부독재는 오래전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열사정신 계승" "민주주의 수호" 만장은 유효하며, 마석 모란공원에는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는 사회. 모든 게 그때 그대로인데 늘 차가운 거리에서 고생하던 박래군만 감옥에 갔다.

 

그의 구속 다음날, 서울고법이 용산참사의 미공개 수사기록을 변호인에게 공개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검찰이 반발하고 있지만 머잖아 그 '3000쪽'의 비밀이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다시 그가 봄을 그릴 수 있는 것일까? 이 지독한 추위를 밀어내고 봄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일까? 하기야 늘 "냉동고에 1년이나 있던 그 사람들은 얼마나 추웠을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그가 아니었던가. 다가올 봄은 분명히 박래군의 가슴으로부터 올 것이다.

 

'동화'라는 시 한편을 그에게 보낸다. 그도 오랜만일 것이다. '겨울꽃'. 그의 동생 박래전이 살아있을 때 지었다는 시다. 그가 빨리 나와 모란공원의 여섯 영정 앞에 깊은 절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冬 花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습니다

 

제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봄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출처 : 고운 김영은
글쓴이 : 고운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