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편지
친일, 친일파, 반민특위 2009/11/09 10:49 정운현
정 선생님
저는 고 장준하 선생님의 삼남으로서 현재 미국 커네티컷에서 유학생들과 함께하는 작은 교회를 돌보고 있는 장호준 목사입니다.
최근 박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 및 배포금지 신청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첨부한 내용과 같은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졸필이나마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서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 선생님께 편지를 전합니다.
정 선생님의 귀한 글에 늘 감사를 드리며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올림
저는 고 장준하 선생님의 삼남으로서 현재 미국 커네티컷에서 유학생들과 함께하는 작은 교회를 돌보고 있는 장호준 목사입니다.
최근 박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 및 배포금지 신청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첨부한 내용과 같은 서신을 작성했습니다.
졸필이나마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서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 선생님께 편지를 전합니다.
정 선생님의 귀한 글에 늘 감사를 드리며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올림
지난 토요일 낯모르는 이에게서 이메일 한 통이 도착했습니다.
보낸 이는 놀랍게도 장준하 선생의 3남 장호준씨였습니다.
그는 현재 미국 커네티켓에서 작은 교회의 목사로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장 목사는 “최근 박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 및 배포금지 신청을 제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첨부한 내용과 같은 서신을 작성했다“고 밝히고는
“졸필이나마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민족의 역사가 바로 서는 길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 선생님께 편지를 전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리고는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편지를 첨부해 보내왔습니다.
'숙명의 두 사람' 장준하(왼쪽)와 박정희. 사진속의 장준하는 광복군 제3지대 소속 육군 중위 시절이며,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 졸업 후 만주군 육군 소위 임관 직전의 모습임.
젊은 세대들에겐 다소 낯선 이름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장준하(張俊河, 1918~1975) 선생을 간단히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제말기인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끌려가 중국땅에 체류 중이던 선생은,
김준엽 등 동지들과 목숨을 걸고 일본군을 탈출하여 수 천리 길을 걸어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머물고 있던 중경으로 가 광복군에 합류하였습니다.
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제하 전력과는 극적 대비를 보이는 대목입니다.
아시다시피 박 전 대통령은 문경서 교사로 있다가 만주로 건너가 만주군 장교가 되었죠.
해방 후 귀국한 선생은 전쟁 와중인 1953년 <사상계>를 창간해 정론을 펴나갔으며,
1967년 정계에 입문, 제7대 국회의원(신민당)으로 당선됐으나, 4년 뒤엔 탈당하였습니다.
그 무렵 선생은 박 정권에 대해 누구도 하기 어려운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1974년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통하여 박 정권을 통렬히 비판했고,
나아가 야권과 범민주 세력의 통합에 진력하였으나 큰 성과를 이루진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1975년 8월 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감하셨는데요,
저는 선생을 우리 현대사에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표상’이라고 기록하고 싶습니다.
이번에 선생의 3남 장호준 목사가 제게 보내온 편지 제목이 예사롭지 않군요.
이는 1974년 장 선생이 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연상시킵니다.
편지에 담긴 구체적인 내용은 아래 전문을 통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장 목사께서 이 편지를 보낼 당시는 법원의 결정이 내려지기 전이었으나,
그 다음날 법원이 박씨가 낸 '게재금지 가처분'에 대해 기각 결정이 내려졌음을 밝혀둡니다.
그래서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포함이 됐구요.
편지 가운데 '가처분' 관련 대목은 시점이 지나 무의미한 얘기가 돼버렸습니다만,
나머지 내용은 박씨가 새겨들을만한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일가 모습. 가운데가 박근혜씨이며, 오른쪽 끝이 박지만씨.
[박지만씨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
박지만씨,
지만씨의 이름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버님의 의문사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낮에는 가게 점원으로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시절, 동창들의 입을 통해 중앙고등학교를 다니던 지만씨의 이름이 들려지면서 부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후 그리도 잔인했던 1980년 5월을 훈련소에서 보내고 전방에서 사병생활을 하던 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는 지만씨의 소문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고, 한동안 듣지 못했었던 지만씨의 이름을 내가 다시 듣게 되었던 것은 싱가폴에서 마약중독자 상담원으로 일을 하던 당시 지만씨가 마약중독으로 치료감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만씨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최근 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였습니다.
박지만씨,
지만씨와 나는 너무도 다른 삶의 공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지만씨와는 스쳐 지나갈 기회조차도 없었고 또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서야 지만씨에게 이런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같은 역사 속을 헤치며 살아야만 했었던 한 사람으로서 역사를 향해 다하지 못한 책임에 대한 고백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지만씨,
나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일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일본군이었고 내 아버지는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군이었다거나, 지만씨의 아버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고 내 아버지는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 바친 민족주의자였다는, 또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부정한 재산을 남겨 주었지만 내 아버지는 깨끗한 동전 한 닢 남겨준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는 역사가 스스로 평가하도록 맡겨 두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있었던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혹자는 역사는 승자에 의한 기록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인류 역사는 사필귀정이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신념 뿐 아니라 부정한 권력에 의해 조작되었던 인혁당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지게 되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만씨가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또는 불리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역사를 지우고자 한다면 역사는 지만씨의 이와 같은 행동을 또 다른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박지만씨,
내 아버님은 의문의 죽임을 당하시기 불과 수 개월 전에 지만씨의 아버지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백억의 인간이 살다갔습니다. 그 중에 ‘가장’ 되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죽으면 내 집이 어찌되겠는가’하는 걱정을 안고 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발전하여 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지만씨나 나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한민족의 역사는 기록되어 남겨져야 하며 또한 전해져야하는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입니다. 역사가 평가하도록 남겨두어야 할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를 지우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다시 당부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수용소 소장으로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몬 게트(Amon Goeth)의 딸은 ‘내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미래를 위해 무언가는 해야 한다’라고 다짐하면서 생존자 중 한 사람을 만나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아버지의 과거를 듣고 용서를 빌게 됩니다.
박지만씨,
이제 우리는 살아서 오십대 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짧지만 길었던 삶속에서 또한 우리는 지나온 역사가 결코 우리의 손에 의해 바뀌어 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되었다는 지만씨에게 내 아버님께서 평생 가슴에 품었었고 이제는 내 가슴속에 품겨져 있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전해 드립니다. 자식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취소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역사와 후손들 앞에서 지만씨의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 통일을 위해 지만씨의 삶이 쓰여 지기를 빌어봅니다.
미국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박지만씨,
지만씨의 이름이 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아버님의 의문사 이후 학업을 중단하고 낮에는 가게 점원으로 밤에는 포장마차에서 일을 하면서 살아가던 시절, 동창들의 입을 통해 중앙고등학교를 다니던 지만씨의 이름이 들려지면서 부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 후 그리도 잔인했던 1980년 5월을 훈련소에서 보내고 전방에서 사병생활을 하던 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었다는 지만씨의 소문을 심심치 않게 들었었고, 한동안 듣지 못했었던 지만씨의 이름을 내가 다시 듣게 되었던 것은 싱가폴에서 마약중독자 상담원으로 일을 하던 당시 지만씨가 마약중독으로 치료감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지만씨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최근 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였습니다.
박지만씨,
지만씨와 나는 너무도 다른 삶의 공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나는 지만씨와는 스쳐 지나갈 기회조차도 없었고 또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지만씨가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법원에 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제서야 지만씨에게 이런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같은 역사 속을 헤치며 살아야만 했었던 한 사람으로서 역사를 향해 다하지 못한 책임에 대한 고백 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지만씨,
나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일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일본군이었고 내 아버지는 일제와 맞서 싸웠던 독립군이었다거나, 지만씨의 아버지는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고 내 아버지는 민주와 통일을 위해 목숨 바친 민족주의자였다는, 또는 지만씨의 아버지는 부정한 재산을 남겨 주었지만 내 아버지는 깨끗한 동전 한 닢 남겨준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역사는 역사가 스스로 평가하도록 맡겨 두라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있었던 역사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입니다. 혹자는 역사는 승자에 의한 기록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인류 역사는 사필귀정이라는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 신념 뿐 아니라 부정한 권력에 의해 조작되었던 인혁당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역사의 현장을 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 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번지게 되는 것이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만씨가 자신에게 수치스러운 또는 불리한 사실이라는 이유로 역사를 지우고자 한다면 역사는 지만씨의 이와 같은 행동을 또 다른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록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두기 바랍니다.
박지만씨,
내 아버님은 의문의 죽임을 당하시기 불과 수 개월 전에 지만씨의 아버지에게 공개서한을 보내면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지구상에는 수백억의 인간이 살다갔습니다. 그 중에 ‘가장’ 되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내가 죽으면 내 집이 어찌되겠는가’하는 걱정을 안고 갔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사회는 발전하여 왔습니다. 우리들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지만씨나 나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민족은 발전해야 합니다. 그런 이유에서 한민족의 역사는 기록되어 남겨져야 하며 또한 전해져야하는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역사입니다. 역사가 평가하도록 남겨두어야 할 역사인 것입니다. 역사를 지우려는 오류를 범하지 말기를 다시 당부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수용소 소장으로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아몬 게트(Amon Goeth)의 딸은 ‘내가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미래를 위해 무언가는 해야 한다’라고 다짐하면서 생존자 중 한 사람을 만나 잔혹하고 치욕스러운 아버지의 과거를 듣고 용서를 빌게 됩니다.
박지만씨,
이제 우리는 살아서 오십대 초반을 보내고 있습니다. 짧지만 길었던 삶속에서 또한 우리는 지나온 역사가 결코 우리의 손에 의해 바뀌어 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확실히 믿는 것은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버지가 되었다는 지만씨에게 내 아버님께서 평생 가슴에 품었었고 이제는 내 가슴속에 품겨져 있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라는 글귀를 전해 드립니다. 자식에게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게재금지 가처분과 배포금지 신청을 취소하십시오. 그리하는 것이 역사와 후손들 앞에서 지만씨의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 민족 통일을 위해 지만씨의 삶이 쓰여 지기를 빌어봅니다.
미국 커네티컷에서
장호준
출처 : LA 蘭珠
글쓴이 : 蘭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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