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대통령의 대범함과 죽인 권력자들의 옹졸함
1997년 4월 [원대신문]에 “대통령이 물러나야 할 일이다”는 제목의 글을 실은 적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이 ‘소통령’으로 불리며 국정을 말아먹고 있을 때 아들이 비난이나 처벌을 받는 것으로 끝날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중앙일보]에 대학교수가 대통령의 퇴임을 주장했다는 식으로 보도되기도 했는데, 그 무렵 대학을 사찰하던 정보부 직원이 [원대신문]에 내 글을 더 이상 싣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 ‘민주주의’를 내세운 소위 ‘문민정부’에서 있었던 일이다.
2003년 3월 [남이랑북이랑]에 “노무현도 부쉬의 개가 되려는가”는 자극적인 제목의 글을 실어 여기저기 보냈다. 인터넷으로도 많이 퍼뜨렸다.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올렸다. 명분이란 손톱만큼도 없고 온 세계가 비난하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병력을 보내려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어떠한 압력도 들어오지 않았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글이 지워지지도 않았다. 이전의 정부들과는 너무 달라 은근히 감동을 먹었다. 표현의 자유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 지지나 찬성보다는 비판이나 반대의 글을 많이 쓴 편이었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그를 가장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권위주의를 벗어던지고 민주화를 진전시킨 점이다. 대통령으로서의 위신이나 체통을 지키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꾸밈없이 소탈했던 그의 언행이 몹시 좋았다. ‘절차적’ 또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실질적’ 민주주의로 향상시키고 정착시킨 업적은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언론의 자유를 그토록 확장시키지 않았다면 ‘조중동’의 악의에 찬 비난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정승집 개가 죽은 데는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안 간다”는 속담이 가리키듯, 권력을 가진 자에겐 온갖 아첨을 하더라도 그가 죽으면 돌아보지도 않기 쉽다. 그런데 수십만 명이 경상도 촌구석까지 멀리 찾아가 죽은 권력자를 애도하며 추모하는 것을 보면 그는 진정 훌륭한 분이었나 보다. 그러한 위인을 자살로 몰아간 사람들은 한 마디 사과나 반성은커녕 애도나 추모조차 마지못해 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고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그들은 대통령의 자살에 충격받은 게 아니라 애도와 추모로 드러나는 민심에 놀라는 모양이다. 대통령에 걸맞은 예우를 하겠다는 위선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살아있을 때 조금이라도 예우했다면 자살로 이끌지 않았을테고,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예우하는 마음이 있다면 흉측한 전경버스들을 수십대 동원해 추모식장 주변을 겹겹이 막는 멍청한 횡포를 방치하지 않을 것 아닌가.
드넓은 광장을 틀어막는 유치한 짓거리는 시위를 예방하기보다 오히려 분노를 키워 시위를 촉발시키기 쉬울 것이다. 시위를 ‘원천 봉쇄’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길은 민심을 파악하며 여론을 수렴하는 일이지 애도와 추모의 발길을 돌리거나 막는 게 아니다. 이럴수록 죽은 권력자에 비해 죽인 권력자들이 너무 옹졸하고 비겁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하기야 그 둘을 비교해 평가한다는 자체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짓일 수 있겠지만.
나는 이명박 정권의 온갖 악행 가운데서도 가장 못된 것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민주주의를 한참 후퇴시킨 점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전투경찰 없이는 지탱하지 못할 새로운 ‘경찰국가’로 만들고 있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근대적 경찰국가’가 아니라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짓밟으며 한줌의 권력만을 지켜주는 ‘현대적 경찰국가’ 말이다.
한치 앞만 내다보며 과잉충성을 한답시고 드넓은 광장을 틀어막는 ‘똥개’들을 멀리 내다보며 바른 길로 갈 수 있는 ‘충견’들로 만들 수 없을까. 그리고 죽은 사람의 유지를 들먹거리며 화해와 통합을 강조하려면 죽인 사람들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진솔한 사과와 반성부터 내놓는 게 도리라 생각한다.
민주당의 처사도 치사하다. 지난달 재보선을 앞두고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검찰과 언론을 앞세워 노무현 대통령을 욕먹일 때는 혹시 표를 잃을까봐 그를 지키려기보다는 그와 거리를 두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그의 죽음으로 추모 열기가 고조되자 '상주'를 자처하며 그를 껴안으려는 짓이 가소롭고 애처로워 보인다. 노무현 인기의 비결은 꼼수를 쓰지 않고 정도를 걸은 데 있다는 점을 깨닫기 바란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유지를 받들겠다면 그가 이루어놓은 민주화를 후퇴시켜서는 안된다. 남북관계를 훼손시키는 것도 화해와 통합에 어긋나는 일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이나 감찰이나 언론이나 모두 바른 길로 나아가게 되길 기대한다.
[남이랑북이랑]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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